많은 사람이 바쁘게 살아간다. 어쩔 수 없이 생을 이어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안고 그 바쁜 삶 속에 숨 가쁘게 살아가는 모습은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느끼게 한다. 나 또한 살아남기 위해, 생을 이어가기 위해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적어도 내일, 혹은 한 달, 일 년 정도의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날이 언제일까 까마득하던 때가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빈손으로 집을 나온 뒤에 나는 몇 해는 경제적인 결핍이 주는 곤란함을 갖가지 겪으며 살았다.
몸이 아프지만, 병원에 맘대로 갈 수가 없어 병을 키우기도 하고, 아이에게 제때 음식을 마련해주지 못하게 될까 봐 가슴을 졸이며 내 끼니조차 언제 챙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인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남의 삶을 내려다보듯 내 삶을 한 발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도 하고, 담담하게 기록하며 가슴에 쌓인 감정들을 풀어놓으며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다시 겪으라 하면 그때만큼 담담하게 겪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 경제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때처럼 당장 겨울을 걱정해야 할 만큼의 지독한 상태에서는 벗어났다. 그 힘든 시기에 금방이라도 손가락으로 툭 밀면 그대로 넘어져서 울 것 같던 날, 생각지도 못한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힘으로, 그 대가 없는 도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다시 힘을 내던 날도 있었다.
가진 것 없고 사회적으로 아무 힘도 없던 나를 의도적으로 속이고 이용하려던 나쁜 사람들도 있었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내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고마운 분들도 있었다. 내가 그 지경에 처해보지 않았으면 실감할 수 없었던 일들을 차례로 경험했다. 정신적인 세계에 치우쳐 있던 생각의 길이 현실적인 문제와의 형평성을 찾을 수 있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나는 다시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풍족하진 못해도 삼시 세끼 끼니 걱정 없이 가끔 불쑥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났다 올 수 있는 건강과 호기를 되찾았다. 3월부터 시작된 백수 생활이 처음엔 다소 불안했지만 이렇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 속에 조금씩 금 간 부분들을 치유하고 쉬게 하고 싶었다.
몇 달간의 휴식과 충전으로 내일을 생각할 힘을 얻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여유를 나눠주고 싶어졌다. 어떤 이들은 돈이 많아야 여행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 없이는 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르니 그 생각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나보다 좋은 집에 살고, 나보다 많은 돈을 번다. 그런데도 나보다 힘들어 보인다.
나름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산다면 남에게 어찌 보이거나 문제가 없겠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을 품고 거기에 눌려서 살고 있다면 문제는 다르다. 무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까.....
좋은 집, 좋은 차를 사고 호의호식하려고?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집도 없고, 차도 없고, 호의호식하며 살지는 못하지만 행복하다. 내 딸도 행복해한다.
오늘은 저녁에 나물 비빔밥을 먹으러 딸과 함께 밖에 나가기로 했다. 통영 전통 비빔밥은 조개나 홍합을 많이 넣은 두부 나물국을 끼얹어서 국물이 자작한 상태로 밥을 비벼 먹을 수 있게 해 주는데 딸이 그 나물밥을 너무나 좋아한다. 바닷가에서 나는 다양한 해초 나물도 곁들여져 있어서 산채 나물 비빔밥 못지않게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저녁을 사 먹고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따라 긴 산책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뭔가 나누고 누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하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함께 잠이 들었다 깨는 아침을 맞는 평범한 일상이 내겐 가장 행복한 생활의 기본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많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거리에서 불만에 찬 얼굴, 고뇌에 찬 표정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잠시 무거워진다. 다들 자신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면 분명 그들 못지않은 문제도 있고, 어려움도 있을 것이지만 그게 크게 도드라져 보이진 않기에 평소엔 큰 괴로움 없이 소소한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
굳이 그네들처럼 복잡한 도시에서 치열한 삶의 경쟁을 하며 많은 돈을 벌고, 가족을 위해 대단한 희생을 하며 살 필요성을 나는 느끼지 못한다. 물론 젊고 힘 있을 때 많이 벌어서 노후를 편하게 지내면 더없이 좋겠지만, 이미 나는 그런 길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으니 그건 내 선택권을 벗어난 일이다.
남아있는 생에 그 정도 걱정거리는 있어야 좀 긴장하며 때론 힘들다고 툴툴거리기도 하며 삶이 주는 숙제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 이 만큼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주변의 벗들께 감사하며..... 그대들의 빡빡한 일상을 보고 내 무료한 삶이 오히려 더 감사하게 여겨진다면 그도 내게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내가 가진 시간과 가진 것 없이 누리는 이 마음의 여유에 때때로 감사하며 살고 있지만, 더 감사히 여기며 내 시간을 잘 써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