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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길 위에서<2016>

4월의 함양 상림

by 자 작 나 무 2016. 4. 21.

4월 20일

함양 상림에 다녀왔다. 오늘은 종일 비가 내리고 해야 할 일도 많으니 어제 망설임 없이 다녀오길 잘했다. 해마다 봄여름 가을 잊지 않고 계절마다 한 번씩은 꼭 찾아가는 곳이다.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함양에 관리로 있을 때 만든 인공 숲이다. 자주 범람하던 강물로 홍수 피해가 잦았던 그곳에 숲을 가꾸고 둑을 쌓아서 백성들을 살기 좋게 만든 좋은 예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 상림 가는 길에 눈에 띄던 집 마당

어릴 때 나서 자라던 집도 마당이 넓고 한쪽에 텃밭도 가꾸고 마루도 있었다. 이십여 년 전에 터가 헐리고 도로가 되어버렸던 그 집 생각이 문득 났다. 나에게 정감 어린 집은 이런 집이다.


걷다 보면 상림 들어가는 길목에 이 집을 지나쳐야 한다. 오곡밥 정식이 맛있는 집이다. 항상 손님이 많아서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것이 흠이다.

꽤 오래전 처음으로 함양 상림에 갔을 때 우리나라에도 평지에 이렇게 잘 가꾸어진 숲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숲길이 너무 좋아서 그 동네로 이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물가에 가지를 아래로 하고 핀 꽃나무를 보니 때죽나무가 떠오른다. 꽃에 독성이 강해 때죽나무꽃이 물 위에 떨어지면 그걸 먹은 물고기가 떼죽음한다는 때죽나무. 


때죽나무꽃이 물 위로 떨어져 흘러가던 때가 언제였던가..... 여기서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항상 다녀가도 언제였던지 뒤져보지 않으면 몇월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5월쯤에 하얗게 때죽나무꽃이 필 것이다. 곧 때죽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그때 다시 와야겠다.


처음으로 때죽나무꽃을 의식하게 된 것은 십여 년 전에 보길도에 갔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록당이라는 오래된 한옥에서 하루 묵었는데 그 집 마당에서 아침에 노랗게 잘 익은 비파를 따먹은 것을 딸이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이전에 여행을 함께 다닌 기억은 내가 찍어서 블로그에 보관한 사진들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이고, 기억이 거의 희미해졌는데 그때 비파를 까먹은 것은 기억 속에 오래 남은 모양이다. 

"엄마, 내가 어릴 때 오래된 집 마루에서 노란 열매 따서 까먹은 곳이 어디야?"

혼자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한적한 숲길을 산책했다.


연리목이 보인다. 두 가지 다른 나무가 뿌리도 따로 내리고 살다가 땅 위에서 한 몸으로 이어져 계속 살아간다. 평생 다시는 떨어지지 못할 인연은 저런 것이다. 서로 삶의 뿌리는 따로 두었을지언정 사는 과정에서 서로 한 몸처럼 마음을 모아 살아가야만 함께 긴 생을 누리고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상하지 않게 하고, 부둥켜안고 공존하는 방법을 저 나무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평일 낮이어서 한적한 것이 좋다. 이대로 어딘가에 누워서 한숨 자고 싶다.










물레방앗간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왔다. 집에서 느지막이 나와서 진주에서 카페 들러서 혼자 점심 먹고 노닥거리다 뒤늦게 버스를 탔더니 돌아갈 시간도 생각해야 할 즈음이 되었다.


갓길을 밟아 걷다가 순간 뭔가 밟을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 뛰고 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길가에 앉아 꿈쩍하지를 않고 있다. 절기로는 오늘이 곡우라 하늘에서 일 년 농사를 잘 지으란 뜻에서 비가 내린다는데 냇물이 마른 걸 보니 한참은 비가 내리지 않은 모양이다.


이 개구리도 가만히 앉아 꼭 비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이제나저제나 비가 좀 내려야 할 텐데.....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뱀인 줄 알고 놀라서 곁에서 수선을 떨어도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다.


걷다 보니 귀를 적시는 새소리에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진다. 새소리를 듣다 고개를 돌려보니 새들이 포로롱 날아 냇가에 앉아 목을 축인다.


몇 모금 호록 호록 마시더니 깡충 뛰어 돌아앉아 멀뚱거리다 포로롱 날아가 버린다.

 

내 존재를 지우고 숲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천천히 걸으며 깊게 호흡하고 내 안에 쌓인 탁한 기운들을 몰아내는 시간을 가졌다.


몸이 아플 때도 이 숲에서 두어 번 왔다 갔다 하고 나면 한결 나아지곤 했다. 이제 막 새로 돋은 잎들이 연해서 더 생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 숲이 좋다.


조용히 걷던 길에 멀리서 박수 소리가 들리더니 노란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내 앞을 지날 때도 계속 혼자 손뼉을 열심히 치며 지나간다. 살짝 쑥스러워서 고개를 돌린 건 나였다. 











숲길은 일찍 어둑해진다. 




저 멀리 환하게 뚫린 다른 공간이 보인다. 한낮에는 이 길에서 마냥 벗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어스름 해지니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해지는 빛을 향해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봄이 다 가기 전에 여름의 숲으로 성장하기 전에 자주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부지런히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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