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의 뜬눈으로 날밤을 지새우는 저는 아침에 못 일어나게 될까 봐 은근히 걱정되면서도 아침에 딸내미 학교 보내고 다시 잠들지 않으면, 오늘은 날씨 좋다 하니 꼭 어디든 가리라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일단 섬진강, 지리산 방면으로 차편이 많은 진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합니다. 하동행 버스를 탔습니다. 하동은 오늘 낮 기온이 23도 정도 되어서 티셔츠 한 장 입고 걸어도 아주 따뜻해서 반소매를 입고 걸어도 될 정도였습니다.
시장을 지나서 하동 송림공원까지 걸어갑니다.
장날이 아닌지라 시장이 조용합니다. 시장을 지나 길을 걷다 보니 한 여인이 길을 묻습니다. 작고 동글동글한 체격에 웃는 얼굴로 살짝 부끄러운 듯이 길을 물어봅니다. 혼자 왔다길래 마침 가는 길이 하동 송림을 찾는다길래 같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습니다.
중국에서 왔다 합니다. 중국 어디 나름 유명한 동네에서 왔던데 듣고도 까먹었습니다. 친구가 횡천에 있는 컨트리클럽에서 일하는데 낮에는 친구가 일하니까 혼자 구경하러 왔다고 합니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통영에서 왔다 하니 작년에 통영에도 놀러 갔었는데 회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며 반가워합니다.
낯선 여행객과 짧은 동행이 날씨만큼 기분 좋게 해 줍니다. 신발을 보아하니 많이 걸으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아 내가 같이 다니자고 붙잡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점심 도시락으로 준비한 김밥을 먹을 거라고 했더니 자기는 구경 가겠다고 알려준 산책코스를 걸으러 가버립니다.
일단 밥부터 먹어줍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집에서 버스 타고 터미널, 거기서 버스 타고 진주, 또 거기서 버스 타고 하동까지 왔으니 일단 버스를 세 번이나 탔습니다. 배가 고플 만도 하죠.
우리 동네 나들가게에서 파는 김밥 한 줄 사 들고 간밤에 끓여 식힌 메밀차 한 통을 담아왔습니다. 지난번에 커피 많이 마시고 화장실 못 찾아서 고생한 것 생각나서 오늘은 커피를 집에서 두 잔 미리 마시고 그걸로 퉁치기로 했습니다.
비둘기도 함께 어울려서 놀고 있습니다.
저 의자에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곳엔 산책로 중간중간에 나무 둥치 모양으로 스피커를 설치하여 클래식 음악을 틀어줍니다. 오래된 소나무 숲과 산책로도 좋고, 그 앞에 바라보이는 넓은 모래톱에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물도 좋지만, 그 길을 걸으며 차분한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저한테는 엄청난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저 숲에서 만난 수많은 커플 중에 저 백발 할아버지와 보라색 점퍼를 입은 할머니 커플이 단연코 제일이었습니다. 두 분은 꽤 오래 숲에 머물러 있으면서 산책도 하시고, 돗자리 펴놓고 도시락도 함께 드시며 즐겁게 지내시더군요.
그런데 젊은 커플 못지않게 손을 하도 꼭 잡고 다니셔서 하필 가던 걸음이 저 두 분 바로 뒤를 걷다가 민망해질 즈음 화장실 앞에 다다랐습니다. 화장실 앞에 가서야 그 손을 놓으시더군요.
남녀 화장실이 따로 되어 있지 않았으면 큰일 날 것 같았습니다. 손을 끝내 안 놓으실 기세더라고요.
혼자 급하게 먹은 김밥을 소화하느라 송림공원을 몇 바퀴를 돌았습니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나무와 강물, 그 앞에 서 있는 산줄기까지 그 모든 걸 온몸으로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걸었습니다. 그러다 몇 번씩이나 부딪힌 저 백발 커플의 밝은 모습을 보고는 나이가 들어서도 저렇게 좋을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발이 되어서도 걸어 다닐 기운 있으면 도시락 싸 들고 저런 곳에 나와서 산책하고 같이 도시락 먹고 즐기면 봄날이 또 얼마나 즐거울까요. 그 생각을 하니 앞으로 나에게도 희망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 송림에 선 멋진 소나무들 덕분이겠죠. 역시 자연과 더불어 데이트하러 나오길 잘했습니다.
앞에서 잘생긴 남자가 걸어옵니다. 내 앞에서 멈춰서 나를 쳐다봅니다. 나도 같이 멈춰 섰습니다. 인물 좋고, 인상 좋고, 덩치까지 좋은데 지적인 이미지라 나도 기분 좋게 쳐다봅니다. 그런데 그 옆에 선 하늘하늘하고 예쁜 여자가 핸드폰을 저에게 줍니다.
사진 찍어달랍니다. 그래서 막막 찍어줬습니다. 둘 다 참 인상이 좋아서 더 부럽습니다.
산책로에 깔아 둔 톱밥 길에 이어 솔방울 길도 걸어봅니다. 여기 재밌어서 서너 번 왔다 갔다 했습니다. 지압 보도 같은 느낌인데 아주 깜찍한 것이 동화 같은 분위기가 나서 기분이 좀 좋아졌습니다.
담요라도 한 장 있으면 저기 누워서 자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인상 험한 한 분이 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근처에 가질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거의 뿌리가 보일 정도로 아래 둥치가 꺾여서 드러누운 나무도 받쳐놓으니 곁가지가 위로 아주 싱싱하게 하늘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이토록 질긴 것이구나 싶습니다. 나무 못지않게 인간의 삶도 금세 힘들어서 깔딱깔딱 넘어갈 것만 같아도 또 어떻게 견디고 넘어가게 되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너무 힘들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저렇게도 살아지고, 살아남은 가지는 곁에 선 다른 나무들보다 더 푸른빛을 발하며 싱싱한 새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둘이 앉으면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할 것 같은 의자네요. 물론 누워서 있을 수 있게 만든 의자겠죠.
밥 먹고 산책 좀 하고 나니 트레킹은 물 건너갔습니다. 너무 졸려서 집에 가고 싶을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긴 벤치에 노숙자처럼 확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노곤한 것이 잠이 그대로 들면 며칠이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볼까 봐 그래도 선글라스 끼고 얼굴도 살짝 가리고 누웠습니다. 뉘 집 딸인지 이마가 훤한 것이 거의 공설운동장입니다.
잠을 못 자서 피부가 너무 엉망인 데다 하도 태우고 다녀서 기미까지 올라와서 정말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뽀샤시 효과로 본판을 살짝 가려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어찌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누워서 나른한 오후를 즐겼습니다. 일어나면 어디로 갈까 생각해보니 발바닥도 아프고, 눈도 그대로 감길 지경이니 집에 갈까 싶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김밥 먹고 소풍을 즐긴 것으로 만족하고 주말에 딸이나 친구랑 같이 놀러 오기로 하고 터미널 가서 진주행 버스를 타야겠었어 3시가 넘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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