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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8>

어제, 가을 풍경

by 자 작 나 무 2018. 11. 22.

다른 곳은 눈이 올 것 같다던 흐린 날 오후, 평소에 눈을 돌리지 않던 곳에 빨갛게 단풍 든 곳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흐린 날 혼자 낡은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몇 달만에 처음 가보는 대숲을 지나서 그곳에서 올 가을 가장 멋진 단풍을 만났다. 가을 나들이 한번 나가지 못한 내가 내 생활 반경 내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늦단풍. 

 

 

 

아무도 찾아와서 앉지 않는 후미진 곳, 그런데 이곳이 이렇게 예쁜 곳인줄 몰랐다.

 

 

홀린 듯 이 붉은 색감을 쫓아 으슥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것 같은 그곳의 마른 잎을 밟고 늦은 가을을 즐기며 속으론 에피톤 프로젝트의 '봄날, 벚꽃 그리고 너'를 떠올렸다.

 

 

 

곧장 내 자리로 달려가 디카를 꺼내 들고 와서 마음속으론 숲 속의 요정이 춤추듯 허공을 뱅그르르 돌고 또 도는 그림 속의 내가 되어 이 풍경을 한껏 즐겼다.

 

 

 

 

 

 

좀더 낙엽이 많이 떨어지기 전에 이곳을 발견했더라면 커피를 담아 와서 이곳 벤치에 앉아서 커피잔을 손에 쥐고 그 따스함을 느끼며 이 붉은빛에 취해 좀 더 가을을 살뜰히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전설 몇 개쯤은 주렁주렁 달고 있을 법한 한적한 곳에 자리한 오래된 낡은 미술실, 그 옆 작은 마당 같은 공간에 이렇듯 가을이 마지막 선물을 흩뿌려놨다. 급식소 옆에 조금 경사진 길 지나면 있는 곳인데 매일 급식소에서 밥 먹으면서 왜 여길 한번 쳐다보지도 않았을까?

 

 

 

날이 흐려서 과하게 채도를 높여서 찍었더니 현실감 떨어지는 색감이 약간 거북하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부푼 마음으로 이 풍경을 보았던 것인지 그 첫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간직해본다.

 

 

 

거의 건물 2층 높이의 크고 풍성한 비파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을 때가 과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정말 멋진 나무다.

 

 

 

 

 

 

봄날에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정말 오래된 낡은 시멘트 계단 양옆으로 검은 대나무를 심어놨다. 뭔지 모르게 이 작은 아지트 같은 벤치 앞으로 가는 길이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 작은 검은 대숲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뭔지 많은 사연을 듣고 자랐을 것 같은 붉은 단풍과 촘촘하게 자란 대나무들.......

 

 

 

이제는 연로해서 더 깍듯이 모셔야 할 것 같은 이 향나무는 너무 볼품없이 이발시켜놔서 안타깝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듣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엿들었을까......

 

 

 

오빠, 남동생, 내가 짝사랑했던 남학생..... 그들이 소년이었을 때 모두 이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렸으리라. 예전엔 단 한 번도 들어와 볼 수 없었던 금단의 남자고등학교에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와서 그들의 흔적이 전설처럼 어딘가 남아있을지도 모를 공간을 서성인다.

 

 

 

 

 

 

 

어릴 때 먹을 것 없을 때 따먹던 까마종과 비슷한 개량 까마종

 

 

 

4H에서 가꾸는 텃밭 옆에 곱게 핀 노란 국화가 복실 강아지 같다. 눈으로 하염없이 쓰다듬다 왔다.

 

 

어딘가 다른 차원의 문을 지나 비밀의 화원에 들어갔다 온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뭘 다시 할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있는 건 없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이 많은 겉늙은 소녀가 되어 살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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