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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10월 30일

by 자 작 나 무 2020. 10. 30.

그 흔한 질문 하나 없이 완벽하게 시험은 잘 치러졌다.

 

12시 반 조퇴 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 선생님의 아주 빠른 차를 타고 진주에서 꽤 유명한 유부 김밥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내 가방과 함께 딸내미 원룸 앞까지 태워줘서 감사하고 기분 좋았다.

 

통영에서 퇴근한 뒤 곧장 터미널로 나를 마중 나올 친구와 오랜만에 만날 약속이 미리 잡혀있어서 딸내미 원룸에서 한두 시간 쉬었다 가면 될 것 같아서 잠시 누웠다. 딸은 바빠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못 보고 그냥 가겠다. 갖다주려던 옷가지를 꺼내놓고 작은 침대에 누워서 뉴스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약속 시각보다 훨씬 먼저 도착하거나, 조금 늦게 도착하는 차 둘 중 먼저 도착하는 차를 타려고 일찍 나섰다. 표를 끊고 금세 도착할 차를 기다리는데 외투 주머니에 응당 있어야 할 휴대전화가 없다. 가방을 뒤져도 없는 것을 보니 딸내미 방에 두고 온 모양이다. 얼른 다음 시간으로 표를 바꾸고 딸내미 방에 돌아갔다.

 

직통버스라고 써놨어도 고성에 들렀다 가는 버스 배차 간격이 거의 한 시간 간격이어서 다시 딸내미 침대에 드러누웠다. 버스 타는 곳까지 5분 정도 걸리는데 조금 일찍 나서려던 참에 마침 학교 갔던 딸이 돌아와서 얼굴은 보고 가게 됐다. 딱 2분 얼굴 보고 큰 가방 하나 끌고 다시 간이버스 정류장에 섰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어젯밤에 들고 나가려던 배낭이 아닌 다른 가방에 짐을 쌌다. 집 열쇠는 그 가방 앞주머니에 들었는데......

 

얼른 딸내미한테 전화했다. 버스 도착하려면 3분 남았다. 여차여차해서 열쇠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네 열쇠를 갖고 뛰어와달라고.

 

휴대전화를 흘리고 오지 않고 그대로 한 시간 전에 통영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주로 다시 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휴대전화 충전기 챙기면서 전화기를 침대 위에 놓고 그 위에 정리한다고 이불을 덮어버려서 깜박하고 전화기를 흘린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전화기를 두고 와서 한 시간 늦게 버스를 타게 되었으니 터미널에서 10분 정도는 나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연락하고 다시 딸내미 방에 다녀올 때도 열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희한하게 버스 타기 전에 갑자기 생각이 난 거다.

 

딸이 가지고 있던 집 열쇠를 들고 뛰어온 딸이 예정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버스가 저 멀리 있어서 우물쭈물하는 내게서 여행 가방을 뺏어서 내 등을 떠밀어주고 가방을 버스 화물칸에 실어준다. 내가 짐 싣고 버스에 늦게 올라탔으면 더 당황했을 텐데 딸이 알아서 뭔가 챙겨주니까 그 작은 일에도 기분이 금세 펴진다.

 

버스에 타자 통로 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께서 자리를 비켜주지도 않으면서 창가 자리로 들어가라신다. 내 덩치에 가능한 일인가?

 

자리에 앉고 보니 건너편 옆자리 아가씨가 마스크를 턱에 걸고 있다.

"버스 안에서 마스크 내리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짜증 난 얼굴로 나를 확 쏘아본다.

 

뒷좌석에선 시끄럽게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휙 돌아보니 마스크 내리고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이 있다.

"아저씨! 차 안에서 마스크 벗고 통화하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계속 그러시면 신고합니다!"

 

요즘 학생들 무섭다며 웅성거린다. 해야 할 말 아무도 하지 않고 자기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서 버스 안에서 자기 편한 대로 다 하는 사람을 두고 누구 하나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내 목소리가 부드러웠을 리 없다. 지난주 같았으면 못 본 척했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동공이 커지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부터 나왔다. 그날이다. 상황으로 봐서 내일이나 그 다음날이 D-Day 되겠다. 오른쪽 뒤통수가 얼얼하다.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쏘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극도로 예민한 상태다.

 

옆자리 아가씨는 진주에서 고성에 가는 30분 동안 끊임없이 통화했다. 내가 한마디 하지 않았으면 마스크 벗고 계속 통화했을 것이다. 그리고 통화하면서 AEC는 기본에 끝에 계속 C를 남발하는 말을 다 들리게 뱉었다.  공공장소에서 사적인 대화와 통화 속에 욕을 섞어서 하는 것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처럼 말에 예민한 사람에겐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고성에서 그 대학생이 내린 뒤에 겨우 목덜미 통증이 희미해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대학생이 많이 타는 동네에서 버스를 타서, 내가 어린 학생인 줄 알고 내가 한마디 한 것을 더 고깝게 여긴 모양이다.

 

원시적인 시대를 아직 지나고 있는 동네에서 탈출하고 싶다. 혹시나 외계인을 만나면 지구인보다 조금 더 정신적으로 진화된 존재가 사는 곳에서 왔다면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고 싶다. 다시 차를 사야 하려나...... 남이 운전해주는 차 안에서 슬며시 잠들어서 꾸벅꾸벅 조는 게 얼마나 푸근하고 좋은데......

 

*

늘 밖에서만 만나던 친구를 처음으로 집에 초대했다. 까칠한 딸이 있어서 우리만의 공간에 누군가 오면 불편한 기색을 할까 봐 조심하느라고 어릴 때부터 아주 익숙한 이웃이나 친구가 아니면 집에 들이는 일이 없이 살았다. 이제는 다들 멀리 이사해서 집에 놀러 올 친구가 없기도 하고.

 

딸이 집에 없으니 집 청소를 했거나 말았거나 밖에 다시 나가서 식당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둘이서 편하게 실컷 이야기하게 배달음식을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밥부터 주문해서 먹고, 차와 간식도 배달비 없이 보내주는 가까운 카페에서 따뜻한 차와 크림치즈 프렛즐을 주문했다.

 

이상하게 친구를 만나기 전에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한참 나눴다. 이야기 하던중에 친구가 나더러 성불구나 성녀 정도 되는 거 아니냐고 놀리다가 장난이 아닌 것 같다며 혀를 끌끌 찬다. 

 

따뜻한 레몬차를 나눠 마시다가 한 입 먹으려던 크림치즈 프렛즐을 뺏었다. 언제 남자를 만나서 갑자기 역사를 이뤄야 할는지도 모르니까 살도 빼고 예쁜 옷도 좀 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한 벌짜리 속옷도 사 놓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며 나를 격려해주고 갔다. 앞뒤 구분도 안 되면서 그 흔한 뽕브라도 사 입지 않는 것이 누구에게 그런 훈수를......ㅎㅎㅎ

 

내가 보여준 사진 앱의 마수에 걸려서 우리 집에서 찍은 셀카와 앱으로 손 본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달라더니 만족스러운지 다운받을 앱을 메모한다. 한동안 헤어나기 쉽지 않을 거다. 나를 실컷 놀려먹고 덕분에 힐링했다고 기분 좋게 웃으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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