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늦은 점심을 먹고 그대로 사무실 의자에 앉으니 묘한 심통이 올라왔다. 혼자라도 나가서 잠시 걸어야 할 것 같아서 점점 무거워지는 심통을 털고 나섰다. 30분 정도의 여유 시간에 급하게 밀린 일을 할 것도 없는데 그대로 주저앉아 일거리를 찾아 하나씩 치우는 청소부처럼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아주 최근에 두어 번 동료와 함께 걷던 길에 오르막 오르기 전에 처음 만나는 정자에서 걸음이 멈췄다. 신을 벗고 단정한 정자에 올라가 앉았다. 호흡을 고르고 앉아있자니 선선한 바람이 지나간다. 그래, 다 지나가는데 왜 그토록 지나간 바람조차 붙들고 여태 속에 품고 있었나 싶다.
내 어리석은 언행 한 가지를 금세 발견한다. 매일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 새롭게 생긴다. 진작에 고쳤어야 할 습성인데 한동안 잠잠하다가 요즘 버릇없이 기어 나오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묻고, 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무덤에서 이미 썩어 해체되었어야 마땅할 회한을 아직 품고 있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 순간 내게 의미 있었던 대로 내버려 두자.
키 낮은 건물 사이로 좁다란 골목을 지나 이끼 낀 계단을 밟아 오른 낮은 옥상에 햇볕 받아 빛나는 장독대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지나다니는 동안 앞서가는 사람을 좇아가느라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못하고 걸음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혼자만의 산책에서 얻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섬세해지는 시선과 잠시 앉아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짧은 명상이라도 곁들이면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우러지는 것도 좋지만, 이미 익숙해진 나만의 걸음이 내게 주었던 여유가 지금의 나를 이룬 것이다.
어우러짐이 적었던 만큼 결핍으로 인한 공백과 허점도 많다. 남의 생각과 기분 맞춰서 응대하는 것에 어눌하고 때로는 한참 모자란 나를 발견한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고 한참 사회화한 사람이 보기엔 내가 얼마나 나잇값 못하는 철딱서니같이 보일까.
이제 동네 가로수인 벚나무에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내일 비가 온다니 비 한 번 내리고 나면 다음 주엔 금세 낮에도 불 켠 듯 환하게 꽃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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