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게 집을 나섰을 땐 바닷가 산책길에 갈 생각이었다. 혼자 거기까지 걷는 게 어쩐지 싫어서 그나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돌아오기 좋을 곳까지 걷기로 했다.
루지, 케이블카 타는 곳 근처에 공원이 그렇게 잘 꾸며져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어서 그곳을 더 구석구석 즐겨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건물 뒤편 산책길을 골라서 걷다 보니 사람과 마주칠 일도 없다.
같은 장소에서 아이폰 8로 찍은 사진은 색감이 사납다. 해 질 녘 붉은빛이 살짝 도는 게 실제 색감과 가까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소에서 내가 느꼈던 정감 있는 풍경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인물 사진도 너무 적나라하게 담아내니까 따로 어플을 쓰지 않으면 자신의 모습이 끔찍하게 해부된 것 같은 장면을 보여준다.
굳이 그렇게 적나라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사진을 담아서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라는 인물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보증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어제 산책길에 담은 내 모습은 얼굴이 많이 부어서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앱으로 구슬러도 아파 보여서 기록에서 제외한다.
루지 타는 곳으로만 알았다면 아마 이곳에 몇 년이 지나도록 들어가는 일 없이 살았을 테다.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을 시각과 장소를 잘 고른 것인지 온전히 혼자였다. 잠시 멈춰서서 10대에 혼자 산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보았다. 이상하게 그 순간이 떠올랐다. 감당하기 힘든 통증에 맞서기 위해 내 속에 있는 뭔가를 적극적으로 조절할 능력이 필요했다.
내가 나를 이기는 힘을 기르기 위해 혼자 산길을 걸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자연과 공명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가끔 숲에서 동물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소리 없는 언어로 내 몸이 안테나처럼 느껴지는 묘한 자극을 주고받았다. 어제도 그랬다. 내 몸은 변화하는 중이어서 방 안에서 혼자 힘으로는 다 견디기에 벅차다.
아주 천천히 되도록 경사지지 않은 길만 골라서 천천히 걸었다. 7시가 다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때여서 시원하고 걷기 좋았지만 조금씩 기운이 어두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도 금세 지나버렸다.
유아 숲체험을 위해 만든 곳이라는 것을 둘러 내려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 옆으로 닦아놓은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궁금해서 퍽퍽해지는 걸음을 옮겼다. 오르막 싫은데.......
그러다 오른쪽으로 작은 계곡 사이로 만든 100세 산책길을 보고 그 길로 내려갈까 하다가 조금 더 그 길을 내려다보며 걷다 보니 왼쪽에서 부스럭, 오른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슬슬 어두워지니 내려가야 할 때가 넘었는데 아직 밝다고 우기며 걷다 보니 꿩 소리가 아닌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샛노랗고 오동통하고 방방한 엉덩이. 샛노란 털에 꼬리가 거의 없는 저 짐승은? 멧돼지 새끼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꽤 엉덩이가 크고 들개는 아니다. 아마도 멧돼지인 것 같다. 멧돼지는 45도 경사진 길도 달려올라올 수 있는 짐승이다.
튀어야 산다! 세상에 이렇게나 길이 잘 닦여 있어도 아무도 없으니 어찌나 무서운지 무릎이 아파서 뛸 수 없다는 것을 잊고 냅다 뛰어내려왔다.
인가도 아닌, 캠핑장을 발견하고는 뛰던 걸음을 줄였다. 산에서 멧돼지는 처음 봤다. 상상보다 덩치가 커서 놀랐고, 새까만 색이 아니어서 더 놀랐다. 얼룩 무늬는 없었으니 호랑이는 아닐 테고, 멧돼지가 물 먹으러 거기 가는 모양이다. 어딘지 알았으니 앞으로 그 근방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
그 녀석이 순간 방향을 돌려서 엉덩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유아 체험 숲에 함께 식사할 수 있게 마련 된 벤치 몇 개 놓인 자리를 점찍어서 내일부터 낮에 혼자 시간 보내기 곤란할 때 음료와 책을 싸들고 와서 거기서 혼자 놀아보겠다고 좋아했다.
멧돼지의 그 크고 노랗고 오동통한 엉덩이만 본 게 얼마나 다행인가. 눈 마주칠까 무서워서 도망치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