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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1>

건널목에서

by 자 작 나 무 2021. 7. 17.

2021. 7.17.

오후에 잠들었다가 깨니 어쩐지 허전하다. 초저녁인데 해가 길어서 아직 밝은데 밖에 나가서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기 싫은 거다.

 

일단 보류,

월말 김어준을 듣는데 와인 이야기가 나온다.

갑자기 와인이 급 당긴다. 집에 남은 와인은 따놓고 맛없어서 고기 요리에나 쓰려고 남겨 놓은 것뿐이다. 와인 사러 마트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이 게으른 몸이 움직여진다.

 

와인을 골고루 파는 대형 마트까지는 멀어서 동네 마트에 갔더니 호주산 쉬라즈를 꽤 저렴한 가격에 할인 판매 중이다. 일단 한 병만 샀다. 안주거리를 준비한 게 없어서 과일 두어 개 깎아놓고 한 잔 따라서 몇 모금 마시니 금세 정신이 흐물흐물해진다.

 

이럴 때 딱히 떠올릴 남자가 없다는 게 아쉽다. 어쩐지 아쉽고 그리운 남자라도 있다면, 잘 마시지 않는 술을 마셨다는 핑계로 전화라도 걸어볼 남자라도 있었다면.......

 

나, 정말 여태 뭐하고 살았을까........ 이 부분은 조금 아쉽네.

 

한때 그렇게 뜨겁던 욕망의 화신 같던 몸도 서서히 세월 따라 식어가고, 덕분에 꼭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누군가 사랑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게 아쉽다. 한때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타인과 섞여서 사는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삶을 살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

와인 사러 마트 가는 길에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키도 좀 크고 덩치도 좀 좋은 남자가 나온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호르몬의 작용이니 내 의지를 넘어선 거다. 건널목 너머여서 자세히 뵈지도 않지만 사실 한 번 쳐다볼만한 남자를 길에서 볼 기회도 드문 곳에 살다 보니 좀 말짱해 보이는 남자가 눈에 띄면 쳐다본다. 

 

정면이 아닌 옆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배가 살짝 나왔다. 살짝 나왔다는 표현보다는 조금 더 나온 평범한 중년 아저씨 몸매다. 내가 남의 몸매 품평할 처지도 아니면서 옷 위로도 드러나는 뱃살을 보고서는 순간 뭔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느꼈다. 내가 이토록 배 나온 남자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처럼 살짝 나온 내 뱃살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남자도 있으려니 생각하니 뱃살은 어떻든 정리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 확실히 든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새로 산 와인을 따서 한 잔 마시고, 어쩐지 기분이 살짝 오르는 게 좋아서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곤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어야 할 이런 생각을 글로 옮기고 있다.

 

남자를 본 순간 키스할 수 있는 남자, 같이 잠까지 잘 수 있는 남자로 구분하고 있는 나는, 인격과 인격체로 만날 수 있는 이성을 만나서 겪거나 익숙해질 기회를 좀처럼 가질 수 없는 유배지 같은 작은 도시에 사는 비극의 산물이다.

 

나에게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주변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내 인생의 한계다. 심지어 나를 수녀 정도로 생각하던 주변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대한 저항 같은 것으로 이런 쓸데없는 자기 고백을 일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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