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잠을 설친 바람에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었다. 화요일 마감인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로 출근했다. 퇴근하면 곧장 집에 와서 잠부터 자고 자다 깨어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가끔 사람 많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가는 교실에서 나와 말동무해주는 분이 민화 전시회 하는 거 보러 가자고 하신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퇴근하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 외엔 하지 않는 내게 그런 제안을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무조건 따라나섰다.
잠시 전시회 구경하고 바닷가 산책하다 보니 건너뛰려던 저녁 생각이 간절해진다. 기분이 좀 풀리니 입맛도 동한다. 둘이 의기투합해서 '하주옥'으로 달렸다. 육전 주문해서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오니 주말에 주문한 이케아 의자 택배 상자가 원룸 앞에 있다.
등받이 없는 벤치에 앉거나 방바닥에 누워서 지내니까 허리가 너무 아파서 몇 달을 쓰거나 등받이 있는 의자는 있어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푹신한 일인용 소파를 사고 싶었지만 원룸이 너무 좁아서 그건 포기하고 29,000원에 판매하는 등받이 의자를 하나 샀다.
어떻게 살거나 사람이 살면 필요한 건 다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점심때 B.K 선생님과 학교 뒤에 있는 공원 한 바퀴 돌다가 발견한 예쁜 꽃
B.K 쌤은 남다른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서른여덟 살 처자다. 이제 결혼한 지 백일밖에 안 된 새댁인데 나를 만날 때마다 시간이 맞으면 원두 갈아서 커피를 내려주신다.
겸무로 왔다 갔다 하면서 힘들다고 한 번 하소연했더니 어찌나 친절하게 마음을 내어주시는지 감사하기 그지없다. 볕 좋은 시각에 일주일에 한두 번 점심시간에 15분~20분가량 함께 걷는 게 나의 유일한 외출인 것 같다.
다른 시간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뭘 하고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나면 생각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상을 종종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월요일 퇴근한 뒤에 처음 가 본 사천미술관.
S.K 쌤 전용실 덕분에 가끔 마스크 벗고 앉아서 잡담도 하고, 가자고 이끌어준 덕분에 처음으로 밖에서 저녁도 먹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는데 여기서 다른 사람과 저녁을 밖에서 먹기는 처음이다. 어린 아들을 두고 타향 살이 하게 된 고된 마음과 오갈 데 없는 내 마음이 잠시 머물렀던 순간. 나도 잘 맞는 사람과는 쉽게 잘 어울리는 사람인 모양이다. 여러 사람과 종종 스치듯 말을 섞지만 반복하는 관계가 되기는 쉽지 않다.
마음의 여유 없이는 새로운 인연과 마음 한 가닥 엮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한철 스쳐갈 인연이다. 그래도 감사하다.
그들은 만으로 아직 30대다. 나와는 띠동갑도 훨씬 넘게 차이 나는데 내가 불편하진 않을지 걱정해야 하는 건지 그조차 모르겠다. 나는 괜찮지만 상대는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더 친해지면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