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주말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가서 밥 먹고 오는 것 외엔 일정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딸을 만나러 나갔다 오면 오가는 시간이 적어도 세 시간 이상 걸릴 것이고 함께 밥 먹고 시간 좀 보내면 반나절은 금세 지날 것이다.
다음 주에 시험 기간이어서 오가는 시간을 많이 쓰기가 곤란하다는 딸의 말을 듣고 내가 잠시 나갔다 오기로 했는데 나 역시 조금 번거롭다. 낮에 집안에 콕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어떤 약속이거나 만들어서 나갔다 오는 게 좋지만 딸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을 아니까 퇴근하고 금요일 저녁을 같이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퇴근 시간 전에 얼른 연락하고 마침 창원까지 운전하는 분의 차를 30분가량 타고 나가서 어딘가에서 내렸다. 그다음은 완행버스를 타면 되니까 집에 들렀다가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 완행버스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그곳까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으니 괜찮다.
어딘지도 모르는 지점에 나를 내려주셨다. 작은 동네여서 그 동네 완행버스 세우는 곳을 검색해서 걸어가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버스정류장 근처에 와서 생각하니 지갑이 없다.
빠른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리를 출퇴근하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일과가 없어서 요즘은 거의 지갑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가끔 뭔가 배달 주문해도 휴대전화 하나면 해결된다. 그래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 천 원짜리 지폐 두 장 정도를 화장품 파우치 안에 넣어서 들고 다닌다.
그런데 마침 금요일엔 파우치를 들고 가지 않았다. 일과 끝나고 바로 퇴근하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카드도 현금도 없는 그 상황에서 낯선 거리에서 딸이 있는 지점까지 이동할 버스 요금만 해결하면 되는데 버스 요금은 앱카드를 쓸 수는 없으니 문제다.
학생 몇몇이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갑자기 처음 본 사람이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천 원짜리 두 장 빌려주면 바로 입금해주겠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만 해도 어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금세 시외를 오가는 완행버스가 다가온다. 일단 버스를 탔다. 앱카드는 안 되냐고 여쭤보고 앱카드로 찍어봤지만 요금 결제가 안 된다.
딸에게 전화해서 내가 내릴 지점에 교통 카드 들고 와서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식은땀이 난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카드로 나중에 계산하면 되는 것 정도로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계산한 대로 일은 해결했고, 딸과 함께 먹은 김밥과 국숫값은 계좌이체로 계산했고, 백화점에서 산 딸내미 운동화 값은 그 백화점 앱카드로 계산했다.
현금을 찾아서 쓰지 않은지 꽤 오래 됐다. 지난 주말에 경주에 여행 가서 고속버스 터미널 보관함에 천 원짜리 지폐를 넣어야 해서 그때 지갑에 있던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교환해서 쓰고 남은 지폐 몇 장이 전부다.
월급도 계좌로 바로 들어오고, 카드값도 숫자만 찍혔다가 빠져나가니 현금을 만질 일이 거의 없다. 포인트를 받았다가 그 포인트를 쓰고 있는 것 같다.
*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빌려주면 바로 계좌이체 해서 보낼 수 있는 상황이어도 그런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만일 딸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 말을 불편하게 듣지 않을 것 같은 젊은 남자나 아주머니를 기다렸다가 말을 건네지 않았을까. 하도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 이천 원 빌려주고 계좌번호 가르쳐 주는 게 무서워서 피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을 거다. 카톡으로 이천 원 보내준다고 하면 되니까 굳이 계좌번호가 아니라 카톡 아이디나 전화번호 정도는 알려줘야 하니까 개인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불편함이 이천 원 빌리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편의점에 가서 편의점 직원에게 부탁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까? 이제 카드를 들고 나오지 않아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때가 곧 오겠지. 플라스틱 카드도 필요하지 않은 때.

어제 고기 먹고 싶다던 딸이 갑자기 국수와 김밥을 먹겠다고 해서 내가 스무 살 때부터 다니던 국숫집에서 따뜻한 국수 한 그릇에 유부 김밥 주문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저녁 먹고 운동화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딸에게 그동안 갖고 싶어하던 운동화를 사줬다. 아니, 갖고 싶어 하던 것보다 더 예쁜 운동화를 골랐다.

얼마 전에 아웃렛에서 예쁜 원피스 한 벌 사 주고 생일 선물이라고 말했는데 생일은 정작 이제 막 다가오니 이번에도 신발 사주면서 생일선물이라고 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딸이 입에 귀에 걸려서 계속 종알거린다.

새로 산 신을 바로 신고 나와서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어줘서 거기서 헤어졌다. 내가 타는 버스 앞에서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안아주길래
"사랑해~"라고 말하니까
딸이 연신 웃으며
"나도 사랑해~" 라고 말하며 떠난다.
음력 생일로 지내면 8년 전 그날처럼 4월 16일이 생일이 될까 봐 이젠 양력으로만 생일을 지내겠다는 딸의 음력 생일을 앞두고 그냥 지나가기엔 내 마음이 섭섭해서 뭐든 해주고 싶었다.
건강하게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