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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아듀

by 자 작 나 무 2023. 10. 15.

2023년 10월 14일

금요일 일정의 피로감이 오늘 내 걸음을 늦췄다.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데 머리가 계속 무거웠다. 사람 목소리를 들으면 기운이 좀 나려나 생각해서 어디든 전화를 하려니 편하게 전화할 데도 없다.

 

아직 어린아이가 셋이나 있어서 주말엔 나에게 시간 내줄 수 없는 직장 동료에게 일없이 문자도 보냈다. 첫째가 모 대학에서 면접을 본다고 오늘은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어렵겠다고 답을 보내셨다. 그렇게까지 설명하지 않으셔도 주말은 어떤지 이해하고도 남는데 내가 어떻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뭐든 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꼼지락거리다가 늦게 나서서 약국 문도 닫아서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찾는 약이 없다. 대충 진통제 한 통을 사고 그 길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동해 바다가 보일만한 동네로 목적지를 찍었다. 시내까지 나와서 찍었는데도 장장 3시간가량 소요되는 거리다.

 

관광객이 오가는 시장통 약국에서 산 약을 들고 길에서 아파서 죽지는 않겠다는 안도감에 어디든 나서다 죽어도 죽어야겠다는 각오로 미친 듯이 길을 내달렸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과 시간대를 살짝 비켜서 다니면 꽤 다닐만하다. 오후 3시 반 출발. 처음엔 울산 대왕암공원을 찍었다가, 해 지고 나서 가봐야 어두운데 기운 빠지겠다 싶어서 근처 음식점 한 곳을 찍었다. 가다 보니 거기까지 가서 제주에서 맛있게 먹은 그 맛도 아닐 곳에 밤에 혼자 가서 밥 먹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서 다음날 아침에 가려고 했던 대형 마트에 갔다.

 

익숙한 구조의 대형 마트가 안도감을 주는 순간도 있다. 꽤 많은 물건을 카트에 가득 담았다가 몇 가지를 빼고 꼭 사야 할 것을 간추려서 계산하고 나왔다. 가벼운 겨울 코트와 그 안에 입을 티셔츠와 딸에게 줄 몇 가지 물건에 목이 칼칼하고 코 안이 답답해서 가습기도 하나 샀다.

 

그 마트에만 파는 내 입에 맞는 와인도 한 병 사고, 그 핑계로 꽃다발처럼 수북하게 묶어서 팔던 아스파라거스에 큐브 치즈까지 샀더니 그 피곤한 시각에도 나름 나를 위한 뭔가를 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된다. 치즈를 비롯해서 냉장 보관할 식자재 몇 가지 산 것이 신경 쓰여서 아침에 수평선 보고 공원에서 산책 좀 하고 돌아가겠다던 계획은 그냥 잊어버렸다.

 

돌아오는 길은 같은 거리였어도 30분 가량 일찍 도착했다. 고속도로 구간과 자동차 전용 도로, 국도 등 다양한 구간을 교차해서 선택해야 하는 그 코스 밤 운전은 정말 힘든 길이었다. 그런데 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차 없는 밤 운전을 즐겼다. 그냥 이대로 내 시간이 끝나도 좋다는 위험천만한 안도감이 두려움조차 눌러서 쉬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고 그냥 달렸다.

 

익숙한 동네에 들어선 다음에 깜박이도 넣지 않고 어디선가 내 앞에 확 끼어든 벤츠 한 대가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내가 속도를 재빨리 줄이지 않았으면 그대로 그 차와 부딪혔을 테고 이유 불문하고 불미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뻔했다. 신호가 바뀌어도 멍하니 있더니 내가 움직이기 곤란하게 차선을 물고 치사하게 운전한다. 음주운전 같아 보이는데 내가 뒤에 계속 가다가는 오히려 더 불편하고 신경 쓰일 것 같아서 좌회전하는 구간에서 차선을 따로 잡아서 내달렸다.

 

갑자기 그 차가 속도를 내지 않아도 될 구간에서 막 달린다. 민소매 원피스만 입고 있던 내가 환기하려고 창을 열고 달리는데 무슨 해코지라도 하려는 줄 알았는지 민망한 순간을 모면하려는 듯 속도를 낸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는데 차선을 물고 진행 방해를 하고 막 끼어들고 무례하게 운전하고도 그러는 게 어이없었다.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다. 가속하다가 그걸로는 안 되겠던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서 같은 섬으로 들어가는 차인데 갈림길에서 방향이 달라서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별 일 없이 잘 왔는데 동네 구간에서 그 차와 신경전을 자동차 경주처럼 벌였다. 

 

"엄마처럼 작은 차로 그렇게 팔도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드물 거야. 엄마는 꼭 좋은 차를 사야겠어."

딸이 취직하면 이 차를 출퇴근 차량으로 쓰고 내게 좋은 차를 사주기로 약속했다. 속도감을 느끼고 싶어서 무리하게 밤운전을 한다고 말했더니 비행기를 타는 게 좋겠단다. 그래서 이륙하는 기분을 몇 번은 느껴야 할 것 같으니 서울, 제주 구간이라도 열댓 번 비행기를 타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

먼 길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정리됐다. 

힘들었는데 더 힘들었겠다. 이해한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

 

호흡이 거의 끊어진 듯 숨을 얕게 쉬니까 머리에 산소 공급이 안 되는지 멍해지면서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게 된다. 시공간 개념이 흩어지고, 내 존재에 대한 감각도 희미해져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밤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이대로 잠들면 그간 내가 본 세상은 끝나는 거다.

 

 

ㅇㅏ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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