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3
예상하지 못한 전화를 받고도 자연스럽게 약속을 정했다. 퇴근길에 걸려 오는 전화는 일주일에 어쩌다 한두 번 건너뛰고 딸이 내 안부를 확인하는 것 외엔 없다. 그런데 금요일 퇴근 이후 시간을 채워줄 약속이라니 감사할 따름이다.
저녁 8시 이후에 들어가서 앉을 카페를 찾는 것부터 문제였다. 그래도 금요일 저녁인데 곧 마감이라고 테이크아웃을 권하는 분위기다. 동네 카페 몇 곳을 돌다가 포기하고 밥과 술을 같이 파는 가게를 찾기로 했다. 전화해서 확인하니 곧 주방이 마감이라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당연히 늦게까지 영업할 것이라고 여겼던 관광객 전용 같은 식당도 문 닫았다.
시골이라고 하기엔 참 애매한 곳이지만, 8시에서 9시 사이에 프랜차이즈 가게조차 문 닫는 이런 곳이면 시골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름 관광 도시인데 여름 한 철만 그렇게 북적였던가 보다. 일주일에 동네 마트나 한두 번, 동네 식당이나 한 번 가는 정도 외에 이 동네에서 경제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내가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게 많다.
결국에 물어서 찾아간 곳은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식당이었다. 밤늦게 손님을 받는 식당이 그런 곳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반찬이 거의 나오지 않는 상차림을 보니 내가 이 지역에 살면서 이런 식당을 알 리가 없다. 관광객이나 모르고 한두 번 들르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물을 장만해 주고 자릿세와 초장값을 받는 가게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갈 일이 없어서 고향인데도 여태 살면서 어제 처음 알게 된 셈이다.
금요일 퇴근길은 늘 지구 끝까지 그대로 가속페달을 밟고 질주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몸은 끝없이 지하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집에 돌아가서는 그래도 사람 사는 일이란 게 잡다한 집안일이 널리고 널린 것이어서 손도 까딱하고 싶지 않아도 꼼지락거리게 된다.
일주일 직업 전선에서 뛰기 위해 켜놓은 스위치를 꺼야 할 시각에 다시 재가동하려니 카페인이라도 들이부어야 했다. 퇴근한 뒤에 고농도 카페인 한 캔을 복용(?)하고 절로 감기는 눈꺼풀에 보이지 않는 스카치테이프라도 붙인 것처럼 정신 무장을 하고 나섰다. 중앙시장까지 가서야 겨우 밥 한술 뜨고 관광객도 뜸한 강구안의 정취를 즐겼다. 관광객이 보는 풍경이 이러한 모양이다. 내가 아는 고향의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익숙하지만 어색한 풍경 속에 주춤거리다가 돌아왔다.
감아뒀던 태엽이 다 풀린 인형처럼 금요일 저녁은 그렇게 탈진한 상태로 멈춰버렸다. 그래도 얼마 만에 느껴본 밤의 낭만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살겠구나..... 나도 밤거리를 걷고 따뜻한 차를 마실 카페를 찾고, 밥과 술이 있는 가게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본 것이 언제였나 싶을 만큼 오래 묵은 낡은 비디오테이프에서 재생되는 흑백 영화처럼 느껴졌다.
길지 않은 그 시간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절로 취한 듯 피곤했던 몸과 청춘인듯 날뛰고 싶었던 마음의 간극이 커서 괴로웠다. 옛날에 하숙집에서 언니들이 그랬다.
"마음은 김완선인데, 몸은 노사연이야....."
88학번 언니들이 그런 말할 때 한 해 더 살아낸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그때 난 알지 못해서 깔깔깔 웃었다.
저녁 있는 삶의 언저리에서 본 밤바다는 나름 낭만적이었다
*
금요일 저녁에 느끼는 피로감의 농도는 매주 다르지만 이번주에 느낀 업무 강도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를 계속 절감하게 했다. 몰입하면 내 에너지가 고갈되는 줄도 모르고 바닥까지 뽑아 쓰는 내 습성을 바꾸지 않으면 이대로 방학 전에 장렬히 전사하겠다.
업무 상의 중압감과 내 인생과의 대립 상태에서는 그래도 내가 있어야 남도 있으니 내 인생이 우선이라고 나이 어린 동료에게 조언했다. 점심시간에 그런 말을 하고 오후에 내 인생을 끌어갈 힘도 남기지 않고 전력질주하는 사람처럼 몸과 마음을 다 쏟아서 일하고, 아픈 데도 불구하고 과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에너지를 쏟았다.
일은 일일 뿐인데 이 직업이란 게 간혹 완급 조절이 어려울 정도로 자신을 압박한다. 능력이 부족하니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도록 힘을 써야만 만족할 만큼 열과 성을 다하는 게 아닐까. 부족한 만큼 인정하고, 내려놓고 조금만 더 가볍게 살자.
내 인생이란 것에 쓸 태엽 한두 바퀴는 남기고 퇴근하자. 제발~~~~
'흐르는 섬 <2020~2024> > <20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 2023.11.04 |
---|---|
강냉이와 커피 (0) | 2023.11.04 |
새 노트북 (0) | 2023.11.02 |
답례 사진 2 (0) | 2023.11.01 |
11.1 (0) | 2023.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