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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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할 준비를 구체적으로 할 심산으로 버벅거리는 머리의 보조 장치로 쓸 메모장을 찾다가 뭔가 발견했다. 책을 읽다가 발췌한 것인지 내 심정을 쓴 것인지 헛갈리는 내용의 일기가 한 장 남아있던 공책을 앞에 두고 잠시 멍해졌다. 언제 왜 썼는지 그 시각의 심정까지 기억해 내던 내 머리의 심각한 지체 현상. 굳이 기억할 필요 없다고 바로 스위치를 꺼버렸던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를 의심하고 본다.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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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를 열어서 주로 간단한 메모를 남기는 편이다. 대체로 방에 있다가 뭔가 생각날 때는 종이 대신 노트북을 펼쳐서 바로 막 써버리고 닫는다. 남겨서 되새길 기억이 아니거나 감정적인 것은 주로 그렇게 청소한다. 그런데 간혹 공책 어딘가에 한두 장씩 남긴 내 글씨나 글귀를 돌아보면 묘한 느낌이 되살아난다.
머리가 더 굳기 전에 스트레칭하듯 책 베껴 쓰기라도 해야 할 판이다. 수능 수학 문제도 슬슬 풀어내던 머리는 지금쯤 접근 금지 팻말이 붙은 폐가처럼 변하지 않았을까. 오늘 문득 녹슬어 가는 나를 열어본다.
만년필 대신 붓펜으로 몇 번 펼쳐서 봐야 할 부분을 옮겨 쓰는데 생각이 가닥가닥 이어지더니 전화가 걸려 온다. 그 부분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던 장이 펼쳐지는 것처럼 나는 녹음했던 말을 틀어놓은 기계처럼 또박또박 말하고 자동 재생 프로그램처럼 거제도를 향해 달렸다.
계산 없이 입에서 나온 말대로 그 시각에 그 자리에서 은인이자 스승이신 강 선생님을 만났다. 함께 점심 먹는 자리에서 그간 미뤘던 이야기를 꺼내서 우리가 얽혔던 인연을 펼쳤다가 접었다. 점심때 시작된 대화는 끊임없이 4시간 넘게 이어졌다.
"........ 괜찮아질 거예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우리 앞으로 50년은 더 만나야 할 텐데.... 식사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세요. 제가 오늘 이 말을 하려고 여기 왔나 봐요."
길거리에서 음식점으로 옮겼다가 강 선생님 사무실에서 다시 길거리 벤치로 자리를 옮기면서 몇 시간 나눈 대화 끝에 나는 온몸이 허공으로 뚫린 상태로 머릿속에서 누군가 하는 말을 전하듯 중요한 말을 전했다.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이미 전생에 녹음했던 파일을 열어서 보여준 것처럼. 이미 경험한 일이 오늘 눈앞에서 펼쳐진 것처럼 미묘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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