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0
일상을 기록하는 일은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올해 남은 기간에 책임져야 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이삿짐을 꾸리는 것까지 순조롭게 해내려면 자는 시간도 아껴야 할 지경이다. 며칠 쉬었다고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책 읽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눈을 혹사하면서 눈 관리를 하지 않았더니 책 몇 장 읽지도 않고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아픈 일이 자주 생긴다. 최근에 이게 노안인가 싶은 경험을 하고 문서를 읽는 게 두려워졌다. 한동안 딸과 통화할 때마다 징징거렸다. 앞이 깜깜하다고.....
그 하소연 덕분에 오늘 딸을 만났다. 안경 벗으면 잘 안 보이니까 네가 와서 꼭 봐줘야 한다고 엉겨 붙었더니 딸이 오늘 시간 내서 와줬다. 안경원에 같이 가기 전에 맛있는 점심부터.
이 동네는 장어구이 기본 반찬에 싱싱한 생멸치회도 나온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맛보고 자란 음식이어서 거부감 없이 살짝 비려도 잘 먹는데 딸은 한두 젓가락 맛보고 만다. 생 멸치회무침 한 접시는 내가 다 먹었다.
식사로 나는 시래깃국을 주문하고, 딸은 장어탕을 주문했다. 장어는 불판에 껍질 부분을 먼저 놓고 익혀서 뒤집어서 자른다.
해마다 서너 차례는 장어구이를 먹으러 다녔던 집에 시간에 맞지 않아서 작년과 올해는 한 번 갔다. 몇 번 나 혼자 가서 장어탕을 먹었을 뿐. 앞으로 이 집 음식 생각 나도 너무 먼 길이어서 앞으로는 이곳에 장어구이 먹으러 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걸음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랜 단골집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안경원에 들러서 시력 검사를 하고 안경알 바꾸고, 책 읽을 때 쓸 안경도 하나 맞췄다. 그게 뭐라고 혼자 가지 않고 여태 버티다가 딸이 여기까지 온 다음에야 함께 갔다. 내가 혼자 가면 안경원 직원이 권하는 대로 아무 테나 골라서 쓰고 나온다고 딸이 기어이 참견해준다. 안 어울리는 거 이상한 것 쓰고 다니지 말라는 거다.
딸의 그런 관심이 싫지 않다. 오히려 감사하다. 그래서 내 삶의 어떤 영역이거나 관심을 두고 챙겨주고 싶어 하면 그 역할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함께 하려는 노력한다. 내게 잘 어울리는 안경테를 골라주거나, 옷이나 신발, 장신구를 고를 때도 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한다. 나는 그렇게라도 딸에게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거다. 주기만 하는 관계는 엉성하고 섭섭하니까.
내가 산책하자고 할까 봐 딸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며 먼저 카페에 가자고 한다. 달콤한 디저트도 먹으며 좀 편하게 앉아 있고 싶다고 확실히 의사 표현을 한다.
매번 혼자 가서 음료 한 잔 놓고 책 몇 장 읽으러 가던 카페에 딸을 데리고 갔더니 창가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만족해한다. 매장에서 나갈 때 카페 주인 내외가 우리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셨다. 운전하면서 쓰고 나온 선글라스에 그대로 들어갔는데 내 얼굴을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나도 이번엔 생긋 웃으며 인사 드리고 나왔다.
카페 운영하시는 분 인상이 나 못지않게 아주 강렬하다고 딸이 한마디 한다. 호락호락한 인상은 아니라고 하더니 학과 친구들이 제 인상이 어떠했는지 나눈 대화를 전해준다. 잠시 안경원에 같이 가기로 한 약속이 종일 함께 노는 일정으로 바뀌었다. 일거리 싸 들고 온 가방은 풀어보지도 않았다.
내일부터 일하다가 장렬히 전사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시간이 어찌 가는 줄 모르고 지나갔다. 나현이 네에 들를 때 가져다줄 선물을 산다는 핑계로 백화점에도 함께 갔다가 선물은 고르지 못하고 겨울 외투를 하나 사 들고 왔다. 사진 몇 장 찍은 바람에 사진 정리하다가 곁들인 잡담 몇 마디가 길어져서 졸음이 쏟아진다.
딸을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피곤한 몸이 공중에 붕 뜬 것처럼 차 안에서 공간 이동하듯 집에 도착했다. 딸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인기 많다는 붕어빵 리어카에서 세 마리 2천 원짜리 붕어빵을 사서 운전대를 잡고 우적우적 베어먹으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붉은 빛을 따라 달리다 보니 제자리다.
사진과 기록이 없으면 나의 하루는 공간 분할도 되지 않고, 시간의 옷을 걸치지 않은 채로 사라진다. 매번 꿈을 꾼 듯 기억나지 않는다. 필요한 버튼을 누르면 출력되는 자동 반사 프로그램이 아직은 유효한 것 같다. 일부러 떠올리지 않아도 늘 파도처럼 떠밀려 다니던 기억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내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기록한다. 혹시 필요해서 꾹 눌러도 기억이 재생되지 않는 순간에 어떤 하루는 아쉬울 때도 있을까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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