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90년대 일기

동기와 결과

by 자 작 나 무 2024. 1. 31.

1994년 봄

마당에 나와서 새로 돋은 잎을 보느라고 서성이다가 재롱을 부리는 우리 집 견공들의 등쌀에 못 이겨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털이 많이 자라 겨우내 털 한 번 잘라준 적이 없는 푸들이 어느새 깔끔하게 지붕 개량을 한 것이다. 게다가 왼쪽 목덜미에 핏자국이 보였다. 놀라서 살펴보니 제법 상처가 깊어서 이걸 어찌해 주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순간 꿈쩍 놀랐다.

 

새로 들어온 수컷이 물어서 그런 것인가 해서 아이처럼 어머니께 쪼르르 달려가서

“엄마, 삐삐가 피를 흘려요. 목에 상처가 큰 게 생겼어요.” 하며 울먹이듯 일렀다.

 

그게 화근이 되어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바탕 언쟁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털을 깎던 가위에 살이 배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약을 내와서 발라주면서 울먹거리는 나와 개를 번갈아 보시더니

“저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곤 아침에 털을 깎은 아버지를 무자비하다고 다그치시고 무안해진 아버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털이 너무 길고 많아서 잘 모르고 잘랐노라고 변명하셨다.

 

동물을 끔찍이도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막 대하면 안 된다고 늘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개가 너무 답답해 보이고 지저분해지니까 깨끗하게 해 주려고 손을 대신 모양이다.

 

그런데 털을 깎아 놓은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상처가 생긴 것 때문에 좋은 의도로 일을 벌였다가 되려 공격을 받고 계신 것이다. 동기와 결과가 늘 같을 수는 없다. 선한 동기로 시작해도 좋지 못한 결과를 맺을 때가 있고, 악한 동기로 시작해도 어찌하다가 좋은 결과를 보여줄 때도 있다.

 

웃지 못할 이 사건으로 인해 살벌해진 분위기를 피해서 내 방으로 숨어든 지금 어떤 쪽으로도 한마디의 변론도 해줄 수 없는 딸이 되었다. 비단 이 일이 아니더라도 좋은 동기로 시작한 일이 예상 밖으로 나쁘고 열악한 결과를 만들어 낼 때는 마땅히 비난받아야만 옳을까. 그렇다고 치명적인 사고를 냈음에도 동기가 선했으므로 그냥 덮어두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세상은 의지대로 살아낼 수 없는 것일까. 주말여행을 떠나며, 나는 또 한 가지 숙제를 안고 떠난다. 돌아올 때는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1990년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꽃 지는 밤  (0) 2024.09.08
지하철에서 만난 개 한 마리  (0) 2024.09.08
'첫사랑'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  (0) 202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