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봄날에 쓴 일기
그가 피를 말리며 시를 쓰는 동안, 나는 그를 그리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이 깊어져 소식마저 끊긴 이후, 내 머릿속에 스치는 모든 단어는 늘 그리움으로 시작되는, 젖어 있는 언어들뿐이었다.
촉촉함이 아니라,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듯, 축축하고 눅눅하게 스며든 그리움. 나는 스스로를 그 그늘 속에 가두어두고,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린 채, 마음까지 굳어져 버렸다. 이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도 모르는, 마치 한쪽 다리를 잃고 비틀거리는 절름발이가 된 것만 같았다.
감꽃이 조용히 지고 있었다. 작년엔 내가 알기도 전에 모두 떨어지고, 어느새 밤톨만한 감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뜰에 나가보니 하얀 감꽃이 소리 없이 피어 있었다. 이미 서둘러 찾아온 더위에 여름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 꽃들은 밤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지난가을, 감꽃이 지는 밤에 아름다운 사랑을 품고 뜰을 거닐며 느꼈던 다짐이, 이제는 유월의 첫날, 희미하게 휘발된 것 같았다. 온종일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게 가슴 깊숙이 시리고 아렸다. 생일이란 이유로 마신 미역국 한 그릇은, 마치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무언가처럼 허전했다. 미안한 마음에 방으로 숨어들었지만, 머릿속엔 그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꾸만 먹을 것을 챙겨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더 이상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커튼을 드리운 방 안으로 자신을 숨기는 이 초라함이 견딜 수 없이 서러워, 서너 번이나 연이어 세수를 하고 찬물로 젖은 얼굴을 수건에 강하게 문질렀다. 그리고 울음이 터질 듯한 숨을 억누르며, 그 슬픔을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다.
정작 내가 애써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보다는 아직은 감정의 문제에 더욱 기민한 것이 사실이다. 어젯밤에도 오늘도 여전히 그리운 이름, 마음에 되니이며 그의 안부를 궁금히 여겨 공연히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립다고 말하면 그냥 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사람. 아니, 웃어도 좋으니 웃는 얼굴 한 번만 더 보아도 좋으련만 간 곳을 모르겠다. 어느 날인가 불쑥 내게 왜 그렇게 넋두리를 많이 써서 올렸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내 이름으로 올린 글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어떻게 내가 쓴 글인 줄 알았을까? 의아했지만, 내심 그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그가 내 글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묘한 반가움이 스며들었다. 그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그와 대화를 나누듯, 나도 그의 글을 쫓아다니며 읽었고, 그의 마음을 따라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여긴 그가 없다.
"시가 팔리지 않아 밥 한 끼 살 돈이 생기면 다시 오겠다"던 그의 말이 겨우내 가슴을 후벼 팠다. 그 말이 아파서 더 이상 보채지도 못했던 지난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조차 이제는 희미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가 그립다. 핼쑥했던 그의 얼굴이 봄바람에 흩날리던 꽃잎처럼 내 기억 속에 서서히 내려앉는다. 그 속에 한 번 파묻혀, 울음을 시원하게 터뜨릴 수 있으면 좋겠다. 왜 말도 없이 떠나버렸는지, 그 이유를 묻지도 못했다.
바꿔버린 내 전화번호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혹시나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아닐까 하는 헛된 착각조차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읽어보니 누굴 그리워하며 쓴 글인 줄 알겠다. 몇 해 전에 찾아보니 그는 잘 나가는 시인이 되었다. 내 전화번호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그는 내게 다시 전화를 했을까.... 아쉽게도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감정도 그려놓으니 기억할 수 있는 한 장의 그림이 된다. 20대 중반에 쓴 글을 옮기다 보니 꼭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출판사에서 인터뷰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았다. 어쩜 세월이 그렇게나 흘렀는데도 저리 곱게 나이 드셨을까. 시 낭독하는 걸 듣고 좋아요를 살포시 누르고 나왔다. 여전히 맑은 눈, 소년 같은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다. 한 번씩 어찌 사는지 궁금한 때가 있었는데, 여전히 시를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흐뭇한 마음으로 추억하고 창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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