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7. 14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하고 나선 걸음에 그녀의 차 안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 낯익은 가사, 가슴을 쿵 치는 듯한 노래 소월의 시를 가사로 삼은 '마야'라는 가수의 진달래꽃.
그녀의 허스키하면서도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목소리로 들려오는 그 노래가 멍하게 정지되어 있던 머리를 흔들어놓았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바닷가 한적한 곳을 드라이브하고 우연히 듣게 된 어느 중학교 교사의 자질 문제를 왈가왈부하는 열띤 대화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때 같았으면 그 문제성 있는 교사와 학생들 간의 문제를 꼬집어 비트는 글을 써서 전교조 사이트나 그 학교 사이트에 올렸을 텐데, 이미 오래전 내 머리로 잔잔하고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생각하기를 멈춰버린 뒤론 도무지 깊이 있게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생각 자체를 거부하는 복잡한 심기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게 어설픈 생각에 뒤로 미루어버렸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 설에 따르면 늘 최상의 단계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하였던 것에 반해 지금의 현실에선 두 번째나 세 번째 정도의 욕구 이상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만큼 단순하고 편협한 생활을 해왔음을 반영해준다.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다른 차원의 욕구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이상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책을 손에서 놓은 지도 오래되었고, 깊이 있게 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파고드는 습성을 따라 흘러본 지도 오래되었다.
낡고 녹슬어서 다시 그런 열정이 재생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가끔은 든다. 진달래꽃 노래를 들으며 며칠 전 이메일로 선물 받은 뮤직비디오 한 편을 떠올리게 되었다.
처음으로 접했던 '마야'라는 가수의 노래가 담긴 뮤직비디오였다. Goodday & Goodbye. 처음 보는 가수, 처음 듣는 노래인지라 선물한 사람의 성의를 보아 두 번쯤 보고 창을 닫아버렸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부른 '진달래꽃'은 그녀의 특이한 목소리가 주는 매력 때문에 다시 듣고 싶어지는 노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벅스에서 그녀의 앨범을 찾고 노래를 듣고 다시금 그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그 영상을 선물해준 사람이 내게 주고 간 목걸이에 나오는 사람이 뮤직비디오 안에도 반복적으로 나왔다.
남미에 위치한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였다. 영상 속에 등장한 것은 그 사회에서 50년대 중반에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가담한 그들의 영웅 체 게바라의 사진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집에서 자라 의사의 길을 걷던 그가 혁명가가 되어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뒤엎고 만든 사회주의 국가 쿠바. 자연경관이 아름답다는 그 나라에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비록 마르크스주의를 숭배하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몸으로 느껴보고 싶다. 모체와도 같던 구소련의 붕괴 후에도 건재한 그 나라의 현실을 자본주의 체제의 불합리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눈앞의 현실과 어떻게 다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추악한 권력의 탐닉과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옹졸함이 아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종식하기 위한 열정과 소명감으로 혁명을 주도했던 그는 그 지역에선 성인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나는 혁명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억압받는 것이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많은 혁명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묵인할 수 밖에 없는 유혈혁명일 수밖에 없음에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혁명가보단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정신세계의 혁명을 주도한 이들을 흠모한다.
마야의 뮤직비디오 안에서 보이는 쿠바의 전경들이 쉽게 가볼 수 없고 접하기 어려운 나라의 모습이어서인지 참으로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체 게바라의 모습이 새겨진 벽이나 그 모습이 새겨진 옷을 입은 가수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종교적인 성인을 존경하는 이들이 그들이 살던 곳이나 삶을 마감한 곳들을 성지라 여겨 끊임없이 순례의 행렬로 이어지는 모습처럼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인 쿠바나 게바라의 유해가 발견된 볼리비아, 그가 여행하였던 페루나 남미의 국가들은 그를 존경하고 행적을 기리는 이들에겐 성지나 다름없고 따라 걸어보고 싶은 여행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쩌면 그 사람도 내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며 그 뮤직비디오를 선물했는지도 모른다. 가수나 노래에 공감하여서라기보단 쿠바와 게바라의 흔적에 사로잡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대결 구도가 소련의 몰락으로 종식된 후로 세계는 자본주의적 경제구조가 새롭게 만든 거대한 경제 제국주의에 종속돼 버렸다.
경제력은 곧 힘이다.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를 핍박하거나 위협하는 일은 약육강식의 구도처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젠가 경제적 약소국은 경제 대국에 예속되어 먹히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적 독립과 구조의 변화가 필연적이라면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어떻게 바꿔야 하고 공평한 분배를 위해 자유를 얼마나 규제해야 하는지, 그 규제를 위한 국가의 역할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규제하는 정권은 과연 인간의 사리사욕에 물들지 않은 정의의 저울 역할을 할 것인지... 부수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기에 학창 시절 그 부분에 관한 생각을 닫아버린 지 오래다.
나처럼 사회에 기여하는 바 없이 평범하게 사는 사람은 그런 문제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을 자신과 같이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탓에 생기는 불합리한 것들은, 그 근본적인 인간 성향을 올바른 판단과 남을 배려하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나름대로 선택한 것이 내겐 교직이었던 것 같다.
그것도 인간 사이에 필요한 규범으로 인식되는 윤리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더라도 가정교육에서 이미 틀이 만들어진 후라 하지만 성장기에 적당한 영향을 주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내 인생에 일과 보람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한 것이 윤리 교사로서의 자리였다.
지금은 그 길을 벗어나 평범한 아이 엄마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기회가 생기면 하여야 할 일이라 여기는 것이 더욱 차원 높은 의식체로의 의식 개혁과 변혁, 거기에 일조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욕심을 내자면 사회 저변에 가장 소외되고 절대적으로 도와야 하는 이를 포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회복지시설이 있지만 충분한 수준은 아니기에 내 평생 그런 것을 만들어 운영할 만큼의 돈을 벌 재간도 없지만, 일확천금이라도 하게 되면 여지없이 남은 내 인생을 바칠 일이 그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거대하지 않아도 좋고 많은 사람에게 큰 파문을 줄 수 없어도 좋다. 미미한 수준에 그칠지라도 않음보단 낫고, 그 미미한 수준의 파장이 다시 세상에 퍼져나갈 때 혼탁하고 어렵고 피폐해지는 속도는 그만큼 느려질 것이고, 정신적 물질적 궁핍과 존엄성의 침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도 그 절대 악에 잠식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시대의 부패한 흐름을 짧은 시간에 바꾸는 혁명의 동기는 정의로워야 하고 과정과 결과도 또한 그러해야 한다. 창너머풍경처럼 만나게 되는 사람 중에 가끔 혁명가의 눈빛과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불씨가 꺼지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묵인하고 방관하는 이방인의 자리에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현실이라는 번거로움 앞에 이상은 숨죽이고 의지는 잠들고 벗어놓은 뱀 허물처럼 치열한 생각의 흔적만 남은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도 젊고 가슴엔 아직도 한 움큼의 온기와 열정이 남아 있는데 난 그 남은 온기로 사랑과 자비를 구하려 한다. 내 좁아진 시야에 존재하는 내 아이를 사랑하고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랄 수 있도록 돌보고 배려하며, 그 아이가 언젠가 또 세상의 물줄기를 따라 큰 바다를 볼 수 있도록........
날마다 퇴보하는 삶을 주도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기보단 어느새 주어진 현실과 처음으로 적절히 타협한 자신을 묵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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