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살던 집은 마당이 넓었다. 몇 그루 큰 나무와 계절마다 바뀌어 꽃피는 화초들이 자라던 마당과 오래된 담쟁이 넝쿨로 여름이면 푸르렀던 바닷가 외진 곳에 있던 그 집은 도로 확장공사를 이유로 스무 살이 넘어서야 헐려졌다.
바깥으로 놀러 나가지 않을 땐 마당에서 밖에서 할 수 있는 온갖 놀이를 다 할 수 있었다. 늘 쓰다듬어줄 강아지가 한두 마리쯤은 있었고 심심할 때마다 마당에 나가면 무엇인가는 볼거리가 있어 좋았던 그 공간을 어머니가 아파트로 이사하시면서부터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자라던 집이 없어졌다는 게 너무 싫어서 처음 이사하고 몇 년간은 그 근처를 일부러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늘 행복한 기억만 있었던 유년은 아니었지만 파란 담쟁이 넝쿨에 섞여 끊임없이 피는 것 같았던 딸기향 나는 분홍 장미가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그나마 그 집의 추억을 잊을 만한 지금은 독립하여 나오기 전 내 물건들로 가득하던 방이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직도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 손때 묻은 물건들로 가득할 그 방이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그대로 남아 있을지...... 어머니가 계신대도 그 집에 가보지 않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
가끔 찾아갈 때마다 제일 먼저 달려가서 열어보는 내 방. 아끼던 책상이며 쓰던 컴퓨터, 애지중지하던 책이며 친구들과 나누던 편지들을 모아둔 상자, 프린터로 뽑아놓았던 많은 갖가지 자료들, 그리고 옷장을 열면 아직도 빛깔 하나 변하지 않고 얌전히 걸려있는 내 옷들.
정장이 대부분이었기에 아이 엄마가 된 후론 그 옷이 필요 없기도 하였지만, 그 옷을 입고 다닐 때보다 붙은 나잇살 때문에 도무지 그 옷을 편하게 입을 수가 없어서 하나도 가져오질 못했다.
요즘처럼 입고 싶은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는 시기에 종종 그 옷장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하늘하늘한 원피스, 블라우스, 구색 맞추어 마련했던 구두며 가방들..... 나도 그런 것들을 걸치고 다닐 때가 정말 있었던가 지금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모습이 달라져 있다는 게 가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지금은 도무지 사 입을 수 없는 비싼 옷들이라 남을 주기도 아깝고 입을 수도 없는 옷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데 그대로 언제든 입을 것처럼 남겨두고 온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은 왜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인지........
조카 아이가 내가 모아두었던 갖가지 CD를 망가뜨려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과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편지함을 뒤져서 수시로 무언가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쓸데없는 애착일 뿐이라고 생각을 돌려보려 해도 마음이 답답하고 슬퍼진다.
한여름 즐겨 입던 원피스 두 벌을 가지러 가고 싶었지만, 눈치도 없이 아직 붙어 있는 옆구리 살을 쳐다보니 가져와 입어도 맵시도 안 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으로 또 덮어버리고 말았다.
신발이 망가지니 신던 구두도 가져오고 싶어지고 책 읽을 시간이 생기니 그 책들을 몽땅 가져오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내가 아니면 그 옷이며 신발, 책들이 누구에게도 소용없는 물건임에도 어머니는 이상하게 내가 쓰던 물건인데도 그런 것을 가져가는 걸 은근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주길 바라시는 것일까...... 늘 한번 거스르지 못하고 그 뜻대로 원하시는 색깔의 옷을 입고, 해주시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시는 곳을 함께 다니던 그런 딸이 되어 그 자리로 돌아와 주시기를 바라시는 것일까.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그때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 때가 없진 않지만 다시는 그런 내가 되어 살고 싶지 않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만든 틀에 매인 내가 되어 산다는 것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맞서지 못했던 것을 아이를 가지게 되어 감정을 상하시게 한 후 집을 나왔다.
간섭은 줄었지만 정말 필요할 때 평범한 어머니들이 줄법한 도움조차도 한번 주지 않으시는 냉정한 내 어머니..... 딸 아이를 키우면서도 정작 그런 어머니를 보면, 내가 내 딸에게 느끼는 마음과 내 어머니가 내게 느끼는 마음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우기며 서운한 마음을 다독거리곤 한다.
비가 내리다가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천둥 벼락이 쳤다가 잠시 화창하게도 개었다가 다시 비가 내리고 흐렸다 개는 오늘 날씨는 한나절 만에 몇 번씩이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날씨만큼이나 내 인생의 흐름도 알 수 없게 들쭉날쭉 꼬인 것만 같다.
그때 왜 내가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자유를 내던지고 아이를 선택했는지 지금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면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이미 선택하여 지나온 일을 되돌아보고 후회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 여겨 그 선택에 대해 생각지 않으려 하지만 간사한 마음이 후회를 부를 때가 있다.
아이를 두고 해서는 안 될 생각이다. 아이도 자라면 어른이 된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아이를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새파란 내 청춘이 시름시름 앓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이미 열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2003.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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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기를 꺼내 읽는데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내가 왜 여태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난 부끄럽게 살지 않았는데 그분의 기준은 다른 모양이다. 아직 이 감정의 벽을 넘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