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0. 10
바람이 제법 거세게 옷자락을 펄럭거리게 했다. 유난히 이 동네는 바람이 드세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 동네에 부는 바람을 'X 바람'이라고 불렀던 것을 이사 와서 살면서야 알게 되었다. 종일 방 안 공기에 침착된 머리를 환기하려고 산책을 나섰다.
돌아오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커피메이커에 물을 부어놓고, 운동 부족이라 약간의 비탈진 길에서도 헉헉거리는 이 부실한 체력보강을 구실로 십 년 정도 신어본 기억이 없는 운동화도 한 켤레 샀건만 일주일 남짓 슬럼프와 함께 찾아온 환절기 감기를 이유로 뜻한 바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려 동네라도 한 바퀴 휘둘러오겠단 생각에서 나선 걸음이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어제 연중행사처럼 찾아가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잘랐더니 뭔지 모르게 어색한 기분이 드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큰 변화는 없었어도 치렁치렁 길어 나오는 대로 자연스레 길렀던 머리를 거의 일자로 잘라놓은 엉거주춤한 모습과 짧아진 앞머리가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너무 변화 없이 버려두었던 자신에 대한 일말의 투자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몇 시간씩 공들이고 거금을 들여 미용실에서 머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을 아주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한테는 엄청난 사치에 해당하므로 일찌감치 그런 욕구는 닫아버렸고, 길어나오는 앞머리가 눈에 걸리면 적당히 거울 보고 잘라주고 뒷머리는 그냥 그대로 길러도 무방한지라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필시 미용실도 현상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조금 큰 듯해서 꺼내입지 않던 면바지들을 꺼내 입어보니 몸에 맞춘 듯 꼭 맞다. 살이 찌긴 찐 모양이다. 적당히 탄력 있어 보일 만큼 쪘지만, 얼굴은 야위고 체력이 떨어지고 의욕도 저하된 것은 살이 찐다는 것이 좋은 의미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꺼내 입어본 면바지에 자주 씻기 싫어서 산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본 바깥세상은 방안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역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이든 피부로 느껴야 한다. 생각조차도 깊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외부에서 주어질 자극도 대부분 차단한 상태에서 내가 해온 생활이 가히 원시적이어서 이 좁은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글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물린 것인가에 대해 반성한다.
게을러서 읽는 것조차 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고 자는 것을 제치고도 하는 것이 글쓰기인 만큼 (이것으로 먹고살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인 것 같다.
20분 남짓 걷는 동안 며칠 통증과 약에 찌들었던 머릿속에 자욱하던 안개가 약간은 걷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주춤거리고 눈 맞추기를 두려워하는 대인기피증과 온라인에선 드러내놓기를 꺼리지 않는 노출증의 양극단의 나를 적절히 조율할 것에 대한 조언을 스스로 해본다.
중독인양 하루에 몇 잔씩 마셔대던 커피를 의사의 권고로 한 주일가량 한 잔도 마시지 않은 뒤라 오늘 마주한 커피 한 잔은 유난히 반갑고 향기롭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뒤로 물릴 수 있는 친구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치료 중에 술과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도 올봄, 같은 증세로 치료를 받는 동안 충고를 무시하고 좋아하는 커피를 계속 마시고 치료를 한 달이나 끌었던 미련한 시행착오를 겪은 뒤인지라 못 이기듯 커피를 끊었던 것을 보면 매사가 마음먹기 나름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늘 아는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번번이 먼 길을 돌아가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너.... 이렇게 사는 게 아깝다."
중학교 때 친구였던 미용실 원장이 머리를 잘라주면서 거울 너머로 내게 던진 말이었다. 공부 잘하는 샌님 같은 모습만 기억하는 그 친구가 내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여서 한 말인듯싶다.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성공까지 겸비해야 적절히 어울리는 성공한 모습일 것이라는 보편적인 가치관대로 평가하자면 30대 중반에 이른 나는 하자보수가 시급하며 뒷감당 불능 코드에 변함없는 백수 모드가 가관인데, 처녀가 애를 배도 제 할 말 있다고 이유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세상은 처녀도 곧잘 애를 배고 낳아서 잘 키운다. 마돈나가 애를 낳아서 키우는 것은 능력 있으니 당연한 일이고 무능한 내가 그러한 것은 손가락질받을 일이라면 할 사람은 아까운 손가락질을 하도록 두면 될 것이고 손가락으로 나를 찌를 것이 아니라면 그까짓 손가락질에 아픈 것도 아닌데 그것을 두려워하던 어머니의 성화를 겹으로 두려워했던 내가 이제야 큰소리할 것까진 없지만 기죽어 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원하지 않는 아이가 생겼으므로 이유가 충분하니 낙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조하지 못한 그때의 판단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다소 무능한 내게 감당하기 벅찬 현실이지만, 나를 하나가 아닌 둘로 만들었고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가도 유일하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아이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런 관계로 내 인생을 깊이 있고 변화의 길로 이끌어줄 변수가 될 것이다.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로 인생은 치명적 오류에 휩싸이게 되기도 하지만 끝내 고집대로 살아내는 것이 내 인생의 컨셉이라고 우기며 30대를 살아가게 될 것 같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의식적 변화의 창을 활짝 열고 깊이 있고 독특한 나만의 색조로 어느 자리에 두어도 슬그머니 어우러질 수 있는 나를 만들어가는 감성 충전 100% 가을, 그와 같은 인생의 절기를 누리고 싶다.
돌아오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커피메이커에 물을 부어놓고, 운동 부족이라 약간의 비탈진 길에서도 헉헉거리는 이 부실한 체력보강을 구실로 십 년 정도 신어본 기억이 없는 운동화도 한 켤레 샀건만 일주일 남짓 슬럼프와 함께 찾아온 환절기 감기를 이유로 뜻한 바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려 동네라도 한 바퀴 휘둘러오겠단 생각에서 나선 걸음이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어제 연중행사처럼 찾아가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잘랐더니 뭔지 모르게 어색한 기분이 드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큰 변화는 없었어도 치렁치렁 길어 나오는 대로 자연스레 길렀던 머리를 거의 일자로 잘라놓은 엉거주춤한 모습과 짧아진 앞머리가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너무 변화 없이 버려두었던 자신에 대한 일말의 투자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몇 시간씩 공들이고 거금을 들여 미용실에서 머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을 아주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한테는 엄청난 사치에 해당하므로 일찌감치 그런 욕구는 닫아버렸고, 길어나오는 앞머리가 눈에 걸리면 적당히 거울 보고 잘라주고 뒷머리는 그냥 그대로 길러도 무방한지라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필시 미용실도 현상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조금 큰 듯해서 꺼내입지 않던 면바지들을 꺼내 입어보니 몸에 맞춘 듯 꼭 맞다. 살이 찌긴 찐 모양이다. 적당히 탄력 있어 보일 만큼 쪘지만, 얼굴은 야위고 체력이 떨어지고 의욕도 저하된 것은 살이 찐다는 것이 좋은 의미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꺼내 입어본 면바지에 자주 씻기 싫어서 산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본 바깥세상은 방안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역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이든 피부로 느껴야 한다. 생각조차도 깊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외부에서 주어질 자극도 대부분 차단한 상태에서 내가 해온 생활이 가히 원시적이어서 이 좁은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글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물린 것인가에 대해 반성한다.
게을러서 읽는 것조차 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고 자는 것을 제치고도 하는 것이 글쓰기인 만큼 (이것으로 먹고살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인 것 같다.
20분 남짓 걷는 동안 며칠 통증과 약에 찌들었던 머릿속에 자욱하던 안개가 약간은 걷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주춤거리고 눈 맞추기를 두려워하는 대인기피증과 온라인에선 드러내놓기를 꺼리지 않는 노출증의 양극단의 나를 적절히 조율할 것에 대한 조언을 스스로 해본다.
중독인양 하루에 몇 잔씩 마셔대던 커피를 의사의 권고로 한 주일가량 한 잔도 마시지 않은 뒤라 오늘 마주한 커피 한 잔은 유난히 반갑고 향기롭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뒤로 물릴 수 있는 친구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치료 중에 술과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도 올봄, 같은 증세로 치료를 받는 동안 충고를 무시하고 좋아하는 커피를 계속 마시고 치료를 한 달이나 끌었던 미련한 시행착오를 겪은 뒤인지라 못 이기듯 커피를 끊었던 것을 보면 매사가 마음먹기 나름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늘 아는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번번이 먼 길을 돌아가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너.... 이렇게 사는 게 아깝다."
중학교 때 친구였던 미용실 원장이 머리를 잘라주면서 거울 너머로 내게 던진 말이었다. 공부 잘하는 샌님 같은 모습만 기억하는 그 친구가 내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여서 한 말인듯싶다.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성공까지 겸비해야 적절히 어울리는 성공한 모습일 것이라는 보편적인 가치관대로 평가하자면 30대 중반에 이른 나는 하자보수가 시급하며 뒷감당 불능 코드에 변함없는 백수 모드가 가관인데, 처녀가 애를 배도 제 할 말 있다고 이유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세상은 처녀도 곧잘 애를 배고 낳아서 잘 키운다. 마돈나가 애를 낳아서 키우는 것은 능력 있으니 당연한 일이고 무능한 내가 그러한 것은 손가락질받을 일이라면 할 사람은 아까운 손가락질을 하도록 두면 될 것이고 손가락으로 나를 찌를 것이 아니라면 그까짓 손가락질에 아픈 것도 아닌데 그것을 두려워하던 어머니의 성화를 겹으로 두려워했던 내가 이제야 큰소리할 것까진 없지만 기죽어 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원하지 않는 아이가 생겼으므로 이유가 충분하니 낙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조하지 못한 그때의 판단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다소 무능한 내게 감당하기 벅찬 현실이지만, 나를 하나가 아닌 둘로 만들었고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가도 유일하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아이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런 관계로 내 인생을 깊이 있고 변화의 길로 이끌어줄 변수가 될 것이다.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로 인생은 치명적 오류에 휩싸이게 되기도 하지만 끝내 고집대로 살아내는 것이 내 인생의 컨셉이라고 우기며 30대를 살아가게 될 것 같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의식적 변화의 창을 활짝 열고 깊이 있고 독특한 나만의 색조로 어느 자리에 두어도 슬그머니 어우러질 수 있는 나를 만들어가는 감성 충전 100% 가을, 그와 같은 인생의 절기를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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