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자작나무 | 2003/10/12 14:06
오후의 햇살이 잔잔한가 싶더니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차를 한잔 마시러 갔더니 일찍 화실 문을 닫고 나서는 걸음에 목욕하러 가자길래 머리를 감고 말리지도 않고 나왔음에도 슬그머니 따라 목욕탕엘 갔다.
아이가 돌아오기 전이어서 둘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던지 평일 낮이 한산한 목욕탕 안에 앉아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루한 시간이 다 지났다. 개운한 기분은 좋지만, 목욕탕에서 보내는 시간은 어쩐지 지루하다. 여전히 부러운 언니의 완벽한 몸매, 옆자리에서 뚫어지게 쳐다보기는 그래도 민망해서 흘낏흘낏 훔쳐보아야 했다.
대학 다닐 적에 하숙방을 함께 쓰던 고향 선배 언니와 목욕탕에 갔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170이 넘는 훤칠한 키에 늘씬한 다리가 예뻤던 선배 언니와도 이렇게 친했었는데, 언니가 결혼하고선 소식이 뜸해졌다. 선배 언니가 졸업한 후에도 나는 대학원 다닌다는 핑계로 학교에 남아서 학보와 편지를 가끔 써서 부치곤 했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하숙집 선배 언니는 그때 그렇게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역시 결혼생활이 주는 벽이 몇 해가 가도 얼굴 한 번 마주하고 차 한잔 나누고 이야기할 시간조차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여서 친구를 곁에 둔다는 것에 대해선 포기한 지 오래다. 그래서 온라인에 더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허전하고 쓸쓸한 심사를 잠시라도 때우기 위해서인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도 여전히 선배 언니는 날씬하고 고상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가끔 시청에 들릴 때마다 불쑥 찾아가 보면 늘 차분한 모습..... 변함이 없었다. 몇 년간 같은 하숙방을 써서 한때 레즈비언이란 소리도 들었을 정도로 친했고, 길을 걸을 때도 팔짱을 끼고 걸었다.
언니의 키가 크다 보니 내가 그 옆에서 주로 매달리듯 붙어 다녔던 탓에 그게 습관이 되어서였는데 둘 다 애인이 없는 시기엔 다들 우리가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다. 문득 그 언니가 처음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만든 남자를 기억해냈다. 그 인연을 맺어준 주범은 바로 나였으므로..... 나를 그 낯선 땅 군산으로 향하게 했던 배신자.
오빠의 군대 선임이었던 그 남자를 내가 첨 만난 것은 이등병 시절 오빠를 면회 가서 어쩔 수 없이 마련한 우리 과 친구들과 그 내무반 선임들의 미팅 자리에서였다. 내 눈에 드는 남자는 그 사람뿐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너무나 아끼고 좋아하던 선배 언니에게 소개해주고 끊임없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나는 그 이후로 언니에게서 무심해졌다. 그 잘난 남자는 제대 후 군산으로 돌아가면서 옛 애인을 만났고 급기야는 배신하고 말았다. (아직도 생각하면 나쁜 놈) 실신하여 드러누운 언니가 수면제를 사 모으는 것을 보고서 하숙집 다른 선배 언니와 전주를 거쳐 군산으로 그 배신자를 면회하러 가는 일까지 해보았지만 돌아선 마음은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언제 사랑하였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이라 여겼던 그들이 그토록 무의미하게 사랑을 접는 것을 보고서 나도 마음에 큰 병을 얻었다. 그렇게 언젠가 비참하게 깨질 수도 있는 것이 불같이 뜨거웠다가도 그렇게 싸늘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대학 4년을 마칠 때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모두 비껴가고 스쳐 가도록 놓아두리라....... 그 청춘을 한번 뜨거운 연애를 못 해보고 지났던 것이 지금은 억울한 생각도 든다. 늘 끊임없이 망상에 시달리면서도 언니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모습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나도 연애를 하지 않았다면 몹시 바보 같은 일이긴 했지만, 그 생각을 역류하게 할만한 인연도 없었던 탓에 대학 생활은 심심하기만 했던 것 같다.
목욕탕에서 화실 언니의 긴 다리를 보면서 무심히 밀리지 않는 때를 밀면서 서로 소식을 끊은 지 오래된 그 선배 언니 생각을 해냈다. 아직도 이왕이면 지적이고 고상하고 분위기 있는 여인의 늘씬한 몸매를 감상하는 것을 즐긴다. 그런 의미에서 여탕은 내게 그다지 에로틱한 장소는 못 된다. 너무 많은 나신이 있고 그중에 벗고 있음에도 내 눈과 신경을 자극하는 그 요소를 다 갖춘 여인과 목욕탕에서 부딪힐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은 까닭인지.
선이 고운 여자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이 위로 올라가서 얼굴에 멈추는 순간 그 황홀한 기분은 반감되고 만다. 화장도 지우고 옷도 입지 않았으나 왜 각기 그 자연의 상태에서조차 다른 느낌이 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지, 여자에 대해서도 이처럼 까다로운데 내가 남자를 보는 눈은 객관적이진 못해도 까다로운 것은 사실인가보다.
나이가 들수록 저 아름다운 나신은 시들어지는 꽃과 같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우니 눈길이 절로 가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나. 애정 결핍의 변태적 발로라고 치부한다 해도 할 말이 없지만, 그녀들의 아름다운 곡선이 주는 나머지 상상력과 결부된 에로틱함은 어설픈 남정네의 애무보다 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