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26일
이전에 더러 찾아와 차를 마시곤 했지만, 꽤 오래전이라 낯익었던 스님은 이미 계시지 않을 듯하여 차 한잔 청하여 마시지 못한 게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새삼 옛 기억들이 수구에 적당히 식힌 찻물처럼 은근한 느낌으로 하나둘씩 떠올라 가슴에 잔잔한 물결로 흘렀다.
한참 그 절에 드나들 즈음 근처에 나와 있던 폐교를 얻어 보육 시설을 갖추고 일종의 사회복지사업을 해볼 계획이 있었고 내게도 동참할 기회가 주어졌다. 마침 그즈음 여러 가지 일이 맞물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 계획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일단락 지어졌던 모양이다.
내 삶의 궤도가 한 번 크게 이탈했던 시점이 그즈음이었나보다. 그때 그 인연들과 엮어져서 하려던 그 일을 도왔더라면 지금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양을 하고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뻔한 아쉬움이 한 번쯤은 찬바람처럼 시리게 가슴을 휘 저어 놓고 만다.
가을이라 하나 아직 그다지 바람이 시리진 않아 산책하기 좋은 절기다. 바닷바람보단 산길을, 들길을 마냥 걷고 싶은 계절이다. 터벅터벅 정처 없이 걸어도 좋을 억새가 키 높아진 길섶을 함께 말없이 걸어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이란 걸 하고 싶었다. 서로를 소중한 인연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 인연이라 여겼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내게 운명이라 느끼게 했던 인연과 맺어지지 못한 것을 보면 그런 사랑을 꿈꾼 것이 내게 가당찮은 일이라고 누군가 비웃으며 번번이 훼방이라도 놓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인생에 있어 인연이란 것은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내게 주어진 인연들에 그저 감사하고 낮은 마음으로 따스하게 맞이하고 품어줄 마음을 항상 지닐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 내가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나도 타인을 존중하고 부드러운 시선,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해야 하리라.
늘 한자리에서 그윽하게 우리를 품어주는 저 산, 하늘, 물과 같이...... 태풍처럼 내 생활을 황폐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인연들을 접하면서 나는 더 물같이 유연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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