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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3>

가을 산책

by 자 작 나 무 2003. 9. 26.

2003년 9월 26일

고성을 지나 진주로 향하는 국도에서 삼천포로 접어드는 길을 찾아들면 그다지 차도 많지 않고 인가도 많지 않은 국도가 있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천천히 달리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곳이다. 그 길을 달리다 보면 와룡산이 보물처럼 품 고있는 운흥사라는 고찰이 있다. 
가는 길목에 크고 작은 저수지를 만나게 되고 저수지에 비친 산 그림자만 보아도 마음이 오롯해지는 그곳에 꽤 오랫동안 사무치게 그리웠던 연인처럼 가보고 싶었어도 쉬이 걸음이 나서지지 않았던 것을 어제 우연히 그곳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추석 전에만 갔어도 어쩜 홍련이 곱게 핀 자태를 그 저수지 둑 아래 펼쳐진 연밭에서 볼 수도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겼지만, 여전히 그 길목에 보이는 풍경들은 일제히 나를 흥분시켰다. 감기 기운에 방안으로 꺼져들 듯 누울 자리만 보이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들뜬 마음이 가을의 정치에 한껏 취하도록 아픈 것도 잊게 해주었다. 
앞서 달리는 차 뒤로 떨어져 바람에 살짝 날아올랐다 흩어지는 낙엽의 자취에도 나는 그저 황감하고 황홀하였다. 운흥사는 맞배지붕의 정갈한 자태의 대웅전이 총총히 운치 있는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가슴까지 은은하게 적시는 향 내음과 함께 얼굴을 내민다. 단아하고 옛 맛이 나는 돌계단 사이 병풍처럼 선 대숲을 지나서 다시 돌계단 한층, 그리고 다시 수직으로 오르는 돌계단 위에 근엄한 자태로 압도하는 법당이 보이는 마당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꿈에도 그리웠던 임이라도 만난 듯 사뭇 설렜다. 평일이라 숲도 사찰도 고즈넉했다. 아직은 화사한 햇살이 기분 좋게 법당 한쪽을 비추고 있었다. 삼배를 하고 가부좌 틀고 드높은 지붕아래 앉아 내다보이는 산이며 나무, 하늘을 바라보고 앉았노라니 신선이 된 기분이 꼭 그러할까. 
옷자락에 은근히 배어드는 향냄새도 활짝 열어놓아 사방으로 트인 문으로 넘나드는 신선한 산 내음도 모두 너무나 감미로웠다. 영산전, 산신각 등 작은 전각을 둘러보고선 돌계단 아래 평평하고 너른 돌 위에 자리하고 앉아 화실 언니가 보온병에 정성스레 준비해온 커피와 빵을 나눠 먹으며 숲의 정적을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소곤대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심 공양 후 산책이라도 나오셨는지 스님 두 분이 저 멀리 요사채 앞 언덕진 곳에 서서 우릴 내려다보고 계셨다. 

이전에 더러 찾아와 차를 마시곤 했지만, 꽤 오래전이라 낯익었던 스님은 이미 계시지 않을 듯하여 차 한잔 청하여 마시지 못한 게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새삼 옛 기억들이 수구에 적당히 식힌 찻물처럼 은근한 느낌으로 하나둘씩 떠올라 가슴에 잔잔한 물결로 흘렀다. 

한참 그 절에 드나들 즈음 근처에 나와 있던 폐교를 얻어 보육 시설을 갖추고 일종의 사회복지사업을 해볼 계획이 있었고 내게도 동참할 기회가 주어졌다. 마침 그즈음 여러 가지 일이 맞물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 계획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일단락 지어졌던 모양이다. 

 

내 삶의 궤도가 한 번 크게 이탈했던 시점이 그즈음이었나보다. 그때 그 인연들과 엮어져서 하려던 그 일을 도왔더라면 지금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양을 하고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뻔한 아쉬움이 한 번쯤은 찬바람처럼 시리게 가슴을 휘 저어 놓고 만다.  

 

가을이라 하나 아직 그다지 바람이 시리진 않아 산책하기 좋은 절기다. 바닷바람보단 산길을, 들길을 마냥 걷고 싶은 계절이다. 터벅터벅 정처 없이 걸어도 좋을 억새가 키 높아진 길섶을 함께 말없이 걸어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이란 걸 하고 싶었다. 서로를 소중한 인연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 인연이라 여겼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내게 운명이라 느끼게 했던 인연과 맺어지지 못한 것을 보면 그런 사랑을 꿈꾼 것이 내게 가당찮은 일이라고 누군가 비웃으며 번번이 훼방이라도 놓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인생에 있어 인연이란 것은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내게 주어진 인연들에 그저 감사하고 낮은 마음으로 따스하게 맞이하고 품어줄 마음을 항상 지닐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 내가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나도 타인을 존중하고 부드러운 시선,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해야 하리라. 

 

늘 한자리에서 그윽하게 우리를 품어주는 저 산, 하늘, 물과 같이...... 태풍처럼 내 생활을 황폐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인연들을 접하면서 나는 더 물같이 유연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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