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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3>

바이올린 협주곡

by 자 작 나 무 2003. 10. 10.

깽깽이 소리 같다 하여 좋아하지 않던 악기가 바이올린이다. 일찍부터 연주곡을 즐겨 듣는 편이라 클래식이라 부르는 서양 음악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바이올린곡만은 피해서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심란하고 마음이 복잡할 때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즐겨듣는다. 정경화가 연주한 그 곡은 그런 내 심기를 오히려 확 뒤집어서 제자리로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다른 바이올린 연주자가 연주한 것보다 그녀의 연주를 즐기게 된 것은 대학원생 시절 열람실에서 알게 된 어떤 선배 때문이었다. 연구실이 열악한 인문계열 대학원생들을 위해 마련된 대학원 열람실에서 매일 공부하는 학생 중엔 대부분이 고시를 준비하며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가끔 금요일 저녁에 함께 술자리를 하거나 하는 일이 있었는데 우연히 아는 사람들 따라갔다가 그 선배를 알게 되었다. 그는 소위 말해 운동권 수뇌부였다. 그의 방엔 온갖 이념 서적을 비롯한 갖가지 책들이 즐비하였고, 그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레코드 가게를 방불케 할 정도의 음반과 CD들이었다.

당시 난 가난한 학생에 속했기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려면 테이프 하나를 사기 위해 몇 번쯤 점심값을 아껴야 할 정도였다. 그는 도대체 그 많은 책과 음반들을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부르주아가 소위 말해 운동(?)하는 건 못 봤는데 희귀한 타입인가? 별생각을 다 하며 2차로 옮겨온 그의 방에서 술잔이 오갈 때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DJ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함께 온 사람들의 취향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주로 클래식 연주곡을 들려줘서 나도 반쯤 취한 상태에서 감미로운 선율에 젖어 좁지만, 신기한 그의 방에 매료되어 있었다.

녹차를 마시던 찻잔에 술을 부어 마시며 클래식을 듣고 그가 덧붙여 주는 자의적 해설까지 들을 수 있는 그 술자리는 술을 과히 즐기지 않는 내게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때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처음으로 귀담아듣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물론 그 곡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누구 곡인지 누가 연주한 게 듣기 좋은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요즘도 가끔 그 곡을 듣고 있노라면 10원짜리까지 정성 들여 모아서 음반과 책을 사 모았다던 그 검고 그늘진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몇 번이고 고시에 낙방하고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그때 함께 보았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꽤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동기나 선후배들과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된 후론 전혀 그들의 소식을 들을 길도 없었고 나 역시 누구의 귀에든 내 소식이 흘러 들어간 적이 없었으며 한동안은 궁금하게 여긴 적도 없었다.

요즘 들어 문득문득 학교에 있을 때 보냈던 시간, 인연들이 그립다. 이맘때쯤 법학과 학생도 아니면서 그 과 학생들을 많이 안다는 이유로 지리산 엠티에 함께 가서 주접을 떨었던 생각도 나고 한여름에도 발이 시릴 정도였던 지리산 장당골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어 지리산 정기를 받는다고 난리를 쳤던 기억들..... 무척 아름답고 생소하게 떠오른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느 날 선택하여 들어선 이 길에서 다시금 옛날처럼 생기있게 사람들 속에 섞여서 그렇게 살기 어려워진 것을 나도 잘 알고 있기에 어쩌면 그런 시간이 더 그립고 가슴 아픈지도 모른다.

몇 편쯤 글을 쓰려고 노트에 간략하게 메모한 것을 옮기려다 순간 일어 오르는 회의를 스스로 삼키지 못해 말할 수 없이 아프고 답답한 것들이 목구멍에 컥 걸린 기분이 들어 오늘도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다.

이 삭막한 인생에 음악을 좋아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고마운 생각이 든다.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이 없었던들 이 순간을 내 어찌 견뎠을까.....

가슴에 서늘하게 와닿는 음악을 만들거나 연주하는 이나,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런 느낌을 뼛속 깊이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그들의 열정이 부럽고 고맙기도 하다.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전전긍긍하는 요즘, 냉소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피하면서도 무언가 자신의 내면에 담긴 무언가를 지키려는 노력하고 있고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아픈 것을 무던히 이겨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나 보다.



Mendelssohn - Violine Concerto E minor .Op 64

 

 

1. Allegro molto appassion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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