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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D-day

by 자 작 나 무 2024. 11. 23.

2024-11-23

 

예정된 일정, 오늘은 D-day

오후에 시험 끝나고 밖으로 나올 시간 맞춰서 딸 데리러 갈 일만 남았다.

작년엔 거의 네 시간 운전해서 시험 장소 부근에 숙박하고 아침에 수험장소에 데려다주고 호텔에서 체크아웃할 때까지 머물다가 국립도서관에 구경 삼아 가서 책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수험장소에 딸을 데려다주고 혼자 집에 돌아와서 옛날 사진을 뒤적여본다.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십수 년이 훌쩍 지난 여행 사진 속에서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뭉클해지는 감정에 빠져든다.

 

수능 치는 날에 딸 데려다주고 집까지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느꼈던 기분, 20년 남짓 되는 세월이 한순간에 차창 너머로 휙 지나가버린 것 같은 서글픔이 한순간에 머리로 가슴으로 휘몰아쳐서 내 나이를 자각하게 하던 느낌이었다.

문득 옛날 사진을 보다가 거울을 들여다보니 밤새 잠못 잔 얼굴이 심각한 현실로 도드라진다. 집에 와서 그대로 잠들었다가 한숨 자고 오후에 마칠 때 데리러 갈 생각이었는데 잠들지 못해서 여태 벌서듯 기다렸다.

 

뭔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생의 과업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한 겹씩 한 겹씩 허물을 벗고 점점 얇고 볼품없는 그림자가 되는 기분이 든다. 

 

*

올해 의대생 정원이 대폭 확대된다는 뉴스가 떴을 때 딸이 그랬다.

"나 그냥 수능 공부해서 수능이나 다시 치면 안 될까? 뭔가 더 미래가 보장되는 확실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딸이 과연 그 공부를 6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보다는 내가 6년 더 벌어서 학비를 댈 능력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지점까지만 숨이 가쁜 것 꾹 참고 달리면 좀 쉬어도 될 줄 알고 참고 참고 또 참았던 숨을 6년 더 참으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몇 해 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이미 내가 설정한 그 문턱까지 왔으니 이젠 참았던 숨을 내뿜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참으면 되는지 내게 입력한 시기까지는 어떻게든 견딘다. 더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 일을 손에서 놓으면 금세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낙오자가 되는 것 같이 주입식 교육을 받은 터라 처음엔 어떠한 사소한 실패도 상처 난 등짝에 맞는 채찍처럼 쓰라리고 따가웠다. 그 실패에서 뭘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눈치 보고 자신을 괴롭히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삶에 이미 정해진 것, 꼭 그래야만 하는 정형화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운 셈이다. 굳이 그런 상황에 자신을 내몰고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하며 자책할 필요 없음을. 조금 쉬었다가 걸어야 할 때 좀 뛰면 안 될까? 아님 조금 천천히 걸어서라도 이 길을 가면 안 될까? 반드시 가야만 할 길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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