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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김밥

by 자 작 나 무 2024. 11. 21.

2024-11-21

월요일에 급히 고향에 다녀오는 길에 하나로마트에 들러서 그 동네 주민이 밭에서 길러낸 시금치를 한 봉지 샀다. 포장하고 조금 남은 분량인지 천 원짜리 가격표를 보고 냅다 집어왔다.

 

그 바람에 오늘 김밥을 싸게 됐다. 어제 시금치를 손질해서 데쳐놓으니 뭐 해먹을 거냐고 묻는다. 잡채나 김밥에 쓰면 좋지 않겠냐고 말했더니 김밥이 좋겠단다. 어제 밤늦게 쓱배송으로 배달해 주는 마트에 김밥 재료를 담았다. 어쩐지 발로 뛰어서 후다닥 마트에 다녀와서 음식 만들기엔 에너지가 떨어진다.

 

오늘 낮에 배달해 준 재료 중에 유부는 데쳐서 물기 꼭 짜고 달달 볶아놓고, 당근과 어묵 볶고, 달걀말이로 재료 준비 끝.

가끔 그분이 오신 것처럼 음식 하는데 신이 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이 너무나 강렬하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음식을 만들면 본능적으로 손이 척척 움직이고 뭘 만들어도 맛있다. 오늘은 그런 날은 아니어서 김밥 재료 준비하는데 눈이 자꾸만 감긴다. 날씨 탓이려니 생각하고 김밥 세 줄만 싸놓고 커피 한 잔 들고 내 방으로 쏙 들어왔다.

 

아침에 사과 하나 깎아서 인스타에서 본 레시피대로 사과를 한 접시 먹은 뒤여서 입맛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 그릭요구르트에 땅콩버터를 넣고 알룰로스 첨가해서 섞은 소스 위에 사과 깎은 것을 올리고, 올리브유를 한 바퀴 둘러주고 후추 살살 뿌려서 사과를 그 소스에 찍어먹는 짧은 영상을 봤다.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그대로 해서 한 접시 먹어보니 사과 반 개만 먹었는데도 속이 든든하다.

 

올리브 오일에 땅콩버터까지 느끼할 것 같지만 그렇진 않고 맛없는 사과를 먹어야 할 땐 따라 해 볼 만한다. 꽤 오래전에 산 사과 한 상자가 맛없어서 여태 거실에서 뒹굴고 있다. 그걸 때때로 혼자 먹어치우는 중인데 한때 그렇게 귀하던 사과인데도 맛없으니 딸이 손도 대지 않는다. 깎아서 갖다 바쳐도 한 입 이상은 먹지 않는다.

 

엊그제 문득 아점 준비하면서 딸이 그런다. 자신은 까다롭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 성찰해 보니 몹시 까다롭고 음식도 가리는 게 많은 사람이란 걸 알았다고 한다. 여태 그런 걸 느끼지 못하고 산 것은 딸이 싫다는 음식을 굳이 해서 먹으라고 권한 적이 없고, 딸이 좋아하는 식자재를 주로 하는 요리만 해서 제 입에 맞는 음식만 해줘서 그런 거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척척 잘 먹어주는 딸인 줄 알았나 보다. 깻잎, 오이, 들깨 등등 좋아하지 않는 재료를 요리에 쓰지 않고, 맛있게 먹는 메뉴를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해 줘서 그렇게 가리고 까다로운 입맛이라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오늘도 김밥에 당근은 많이 넣지 말고, 어묵은 꼭 넣고.... 기타 등등. 주문 사항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입맛에 맞게 재료를 쓰는 게 익숙하다. 함께 살면서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양보하며 살았다. 그게 대단한 일은 아닌데 사소한 것 하나씩 부딪히고 내 주장을 내세우면 나보다 어린 딸이 어찌 나를 이해하고 그걸 감수하려고 하겠는가. 너무나 당연한 문제였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내 나이가 많고, 내 직급이 높으니까 너희들이 내게 맞춰. 이게 진리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험이 많고, 직급이 높고, 월급을 많이 받는 자가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기지만, 가볍게 편하게 일하고 월급은 많이 받고, 귀찮은 일은 죄다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이상한 형국이 관례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는 일터를 몇 번 목격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것 투성이다.

 

그런 것에 대항하는 방법은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어 피해를 덜 보는 쪽으로 선택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갈수록 이 세상은 국가 체제 하에 사는 게 노예의 삶과 다를 바 없이 비참해지는 평범한 사람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

김밥 싸 먹고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쓰다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글이 귀결된다. 삶이 궁극적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지만, 최근에 느끼는 이 부조리함은 견디기 힘들다. 그들이 마음대로 쓰는 돈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마디 보태지도 못하는 이들이 억척스럽게 번 돈에서 자동으로 떼어가는 세금이 한 푼 두 푼 모여서 쌓인 것 아닌가. 그게 전부는 아니어도 우리 삶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렇게 벌어서 낸 세금이 누군가의 농간으로 어딘가 흘러가서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우게 한다면, 이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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