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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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환경을 내 방으로 옮겨서 블라인드 치고, 스탠드 켜놓으니까 어쩐지 요새 같다. 이 나이에 처음 누려보는 나만의 공간 1호, 전에 잠시 살았던 학교 기숙사나 관사 없어서 들어간 원룸은 차원이 다르니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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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온도가 그리 낮지도 않은데 난방하지 않은 거실에서 컴퓨터로 오래 작업하기엔 어쩐지 썰렁하다. 내방 책상이 좁아서 책꽂이에 모니터 두 개를 두면 자리가 꽉 차고 불편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여름에 거실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내 방까지 시원하게 하지 못해서 모니터를 거실에 꺼내놓고 거기서 살기 시작했다는 게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생각났다.
책상 정리를 하고 내 방으로 다시 컴퓨터 모니터를 옮겼다. 노트북에 연결해서 거실에 있는 실내 자전거 타면서 영화도 한 편 보고 주방에서 일하면서 뉴스도 들으려고 꺼냈던 거였다. 이제 운동이야 등록한 동네 체육관에 가면 되는 것이고, 추운데 옷을 겹겹이 입고 거실에서 일할 필요는 없겠다.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 가을에 이사해서 지난겨울까지 살다가 이사 나온 그 집은 유난히 추웠다. 워낙 지은 지 오래된 집이기도 하지만, 건물 지을 때부터 팔아먹기 위해 날림으로 지었다고 소문난 건물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이사해서 살면서 알게 된 일이다. 정말 벽에서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오는 허술한 집에서 딸이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년 겨울을 나는 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진작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옮겨 다니며 사는 게 싫어서 그 불편한 집에서 적응하며 오래오래 살았다. 그렇게 오래 한 건물에 살아도 건물주와 특별히 친분이 생기지는 않았다. 가까이에 있고 자주 볼 수 있는 사이였음에도 사람의 성정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친해지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태생부터 부자인 부모 밑에서 자라서 유산을 받아서 계속 부자로 산다고 소문났던 건물주는 우리에게 아무런 사전 통보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전기를 차단하고 공사를 하거나, 수시로 물이 나오지 않는데도 제때 조치를 해주지 않거나, 말하면 입 아플 만큼 세입자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했다. 부자 부모는 자녀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돈을 빌미로 불편하게 하고 말을 들어야 뭔가 준다는 식으로 자녀를 길들이려고 하는 흔한 드라마처럼 현실도 비슷하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해서 부모의 협박에 가까운 제안을 기꺼이 거절할 수 있어야 독립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조건이나 제안 혹은 협박 없이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려면 서로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 물려줄 건물이 있어도 그 댁 자녀는 부모와 함께 살지 않으려고 자주 싸웠다. 어찌나 큰소리로 싸우는지 어쩔 수 없이 몇 번이나 그 소리를 듣게 됐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더 못 본 듯하며 묵례만 하고 지나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건물에서 사업하는 분이니 직장과 집이 일체화되어서 매일 혼자 지내진 않을 테니 어쩌면 그렇게 삶을 이어가기에 큰 무리가 없을 수도 있겠다.
성인이 된 딸과 함께 사는 시간은 단지 내 딸이 결혼할 상대를 찾아서 분리되기 전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는 그때까지 일 거다. 친구네는 딸 둘이 완전히 독립해서 나간 뒤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을 봤다. 남편이 있어도 그리 의지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래도 혼자 사는 건 아니어서 나와는 또 다른 입장일 거다. 남은 삶을 타인에게 의존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아직 생각보다는 긴 세월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는 확률을 무시할 수 없다. 오늘로 이곳에 이사든지 열 달째. 아직 두 달은 더 살아야 1년이 찬다. 엊그제 이사 온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시간이 쉽게 잘 흘러가는 것만 같다. 대단히 큰일은 없었으니 이만하면 잘 살았다. 올해가 한 달 남짓 남았다. 부족한 게 없었는지 점검하고 보완하며 내년은 더 사람답게 잘 살아낼 준비를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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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부터 딸이 한 달 아르바이트로 일한다고 어제 갑자기 연락받고 좋아했는데, 오늘 아침에 그 일이 취소됐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교육청과 학교의 불협화음. 없던 일이 생겼다가 다시 사라져서 딸은 조금 실망한 것 같다. 제 한 달 용돈 정도만 빼고 월급 타면 생활비로 내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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