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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4>

변방의 푸른 바다, 비극을 잉태하다.

by 자 작 나 무 2004. 11. 4.

뜨거운 물로 지친 몸을 달래고 있다. 생활 리듬을 무참하게 깬 피곤한 내 행동이 결국 몸에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지독한 감기를 앓을 예정이다. 어제부터 불편해진 몸이 드디어 반란을 시작했으므로.

 

어떤 일이든 원인 없이 결과가 주어지는 경우는 희박하다. 가끔 우연의 소치도 있지만,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결과를 겪으면서도 불평한다. 원인 제공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무심결에 스쳐 지나버렸거나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기를 앓게 된 원인을 충분히 제공했으니 몸이 아파도 할 말이 없다. 그동안 잘못한 것을 반성하며 알뜰히 내 몸을 챙겨야 사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물을 끓여서 발을 담그고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고 찬 기운이 조금은 잦아든 느낌이 든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면 편안하게 족욕하기도 힘들다.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거의 빈둥거리는 데에 소모하게 되지만 오늘은 빨래하고 청소하고 밀린 설거지며 걸레까지 하얗게 삶아 빨아놓았으니 그래도 조금 나은 하루를 시작한 셈이다.

 

평소에 거의 TV를 켜지 않다가 요즘은 TV를 더러 보게 된다. 어제 우연히 돌리던 채널 중 어디에선가 내가 사는 통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얼마 만에 온 것인지 고향인 통영을 방문한 소설가 박경리 씨의 강연을 담은 화면과 얼마 전에 별세하신 시인 故 김상옥 님에 대한 기사와 더불어 통영 출신의 유명한 음악가 윤이상, 화백 전혁림, 시인 유치환, 김춘수 님 등의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섬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항구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예술인이 많이 났으니 예향이라 불릴만하다. 그들은 천혜의 풍광을 느끼고 겪으며 고향의 품에서 자랐지만, 하나같이 고향을 떠났다. 그 이후에야 이름을 날리고 성공한 것이라는 사실을 들추어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 좁은 도시는 평범한 삶을 가장한 특별한 삶을 기대하는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토양인지도 모른다.

 

나도 한때 고향을 떠나서 다시는 이 좁은 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다른 형제들처럼 서울에 자리를 잡으려고 마음먹고 그 당시 관심 있었던 직종의 면접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부끄럽게 생각할 것도 아닌 경상도 억양을 숨기기 위해 언어교정도 열심히 했다. 서울 쪽에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나름대로 내 생활 전반의 모든 것을 옮길 각오와 바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과 사람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가 생활근거지가 됨으로써 잃거나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갈등을 겪었다.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결국 복잡하고 머리 아프고 바쁜 삶을 선택하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다른 요인들도 충분히 작용하였지만 내게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어서 공기가 나쁜 곳에서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기침을 하니 고향에 눌러앉을 아주 좋은 핑계가 생긴 것이다.

 

때로는 좁고 말 많은 도시인 이곳을 어떻든 떠나서 살고픈 생각도 몇 년 전까진 하기도 했다. 아이와 둘이 사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빚어진 생각이기도 했다. 이 편협하고 발전성 없는 도시의 경치만 먹고 살아갈 수 없으니  아이 교육상 넓은 곳으로 옮겨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갈등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이 동네 경제 사정의 영향도 커서 먹고살기 힘들다는 생각에 마땅한 일을 구하려면 이사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결국 우유부단하게 눌러앉고 말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번 떠났던 바다를 쉬이 떠날 수 없는 끈적한 이끌림을 끝내 뿌리칠 수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떠나서 그리울 바다보다 더 그리운 이가 있다면 그때는 아쉬움을 남기고도 이 올망졸망 바다 위로 겹겹이 드리워진 섬 그림자들을 벗어놓고 떠날 수도 있겠지.

 

 

 

 

   

 

Un Piano Sur La Mer - 앙드레 가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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