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평인 일주도로
드라이브 삼아 이 길을 가볍게 지나칠 때와 걸으며 지날 때의 느낌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던 곳을 어제 혼자 걸을 기회가 생겼다. 아침에 지영이 학교에서 주최하는 가족등반 산행에 참석하려던 것에 차질이 생겨 우여곡절을 겪은 지영이는 한바탕 울고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다 오후엔 내게 자유의 시간을 주었다.
초등생 시절에 걸어서 가을소풍을 해마다 갔던 장소에서부터 출발~
When I Dream - Carol Kidd
하루에 차가 몇 대나 다닐는지? 어제는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한 시간에 지나다닌 차량이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덕분에 조용하게 혼자 사진 찍고 노닥거리며 걷기 좋았다.
지나는 길에 아무도 없으니 이렇게 웃기는 셀카놀이도 하고......
어제 유난히 더워 여름날 같았던 하늘과 바다
반팔 입고 걸어서 팔뚝이 새까맣게 타서 과연 이렇게 그을린 피부가 제 색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어제 낮엔 한여름 같은 볕이 내리쬤다.
퍽퍽하게 오래 걷던 나를 유혹하는 버스가 저 멀리 꽁무니를 보이고 떠나가고 있다. 이 정도 걷고 버스를 탈 바에 시작하지 않는 게 나았다는 결연한 의지로 더 걸어보기로 했다.
한창 확장 공사 중인 길에 먼지가 풀풀 날리기도 하고, 아직 예전의 좁은 길들이 남아 있기도 한 이 길에서 이런 느낌의 옛길은 모두 기억 속에 묻힐 것이다.
스쳐 지나던 이런 풍경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하나의 시가 되고, 멋진 그림이 된다. 이런 느낌들을 즐기며 혼자 걷는 길이 행복하고 좋았다.
산길이 아니어서 다리가 퍽퍽해질 무렵 어느 동네 버스 종점에 닿았다. 10분 전에 버스 한 대가 출발했고, 다음 버스는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이 정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니는 동네라면 얼마나 한적한 곳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으리라.
두 시간 앉아서 기다리느니 그냥 걷는 게 낫겠다 싶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낯익은 팝송들이 내게 위안이 되고 이런 풍경들과 함께 가슴을 설레게도 했다.
어느 정도 메마른 길 위에서 다리가 아파 잠시 쉬어야 할 정도의 정점에 달했을 때, 김샘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와~ 구세주~~~
아무 변화 없었다면 그대로 끝까지 고집스럽게 걸었을 텐데 이젠 아픈 걸음을 정리하고 약속 장소로 빨리 가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기에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야 했다. 젊은 남자 혼자 타고 가는 승용차가 비포장길을 지나는데 손을 들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스쳐 지나가게 두었다.
워낙 인적 드문 길인 데다 여자 혼자 걷고 있으니 어지간하면 차를 세워봄 직도 한데 세상이 워낙 각박하다 보니 서로 조심스러워서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던 차에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지루한 구간의 길에서 승합차를 몰고 가던 아저씨께서 차를 세우셨다.
이 얄팍한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차마 손을 들지 못하고 앞만 보고 꿋꿋이 걷고 있었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내가 가야 할 길과는 좀 먼 곳이지만 그래도 걸어야 할 길을 조금 줄일 수 있는 코스까지는 가신 다기에 차에 올라탔다.
마침 통영, 거제 지역의 조기축구회 팀들이 다 모여서 시합을 하는 날이라 했다. 축구장에서 내가 가야 할 동네까지는 그래도 40분은 족히 걸어야 할 길이었지만 택시가 지나다니는 길이니 한결 나을 것 같았다.
젊은 남자분들로 그득한 축구장 서너 개를 안쪽으로 통과해야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안내를 받고 온통 남자분들뿐인 축구장 갓길을 돌아 나왔다. 와~~ 이런 횡재가 다 있나!
건장한 젊은 남자분들이 짧은 옷을 입고 가볍게 뛰고 있는 모습이며, 대기하고 있는 남자분들도 다들 적당한 노출 패션으로 앉아 있는데 그간 못한 남자 구경을 한꺼번에 하는 순간이었다.
속으론 흐뭇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즐기고 있었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고 엉금엉금 길을 찾아 나왔다. 덕분에 몇 시간 걷고 쌓인 피로가 단숨에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혼자 싱긋이 웃으며 조금 걷자니 마침 축구장에 손님을 태우고 들어왔던 택시가 나가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망설일 여지가 없는 시각이어서 냉큼 올라탔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혼자 걷다 기분 좋게 마무리 한 하루였다.
(지영아! 제주도 올레길만 길인 줄 아니? 엄마가 우리 동네 구석구석 코스별로 걸어 다니면서 이곳만큼 멋진 곳도 드물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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