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라는 노래가 나오기 얼마 전쯤, 더러 버스 타고도 다니고 더러는 빠른 걸음으로 30분 이상 걸리는 길을 걸어서 중학교에 다녔다.
등굣길이나 하굣길에 한 번쯤은 꼭 마주치던 하얗고 곱상하게 생긴 남학생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학년 때 짝사랑하던 과학 선생님께서 전근 가신 후로 어딘가 집착할 곳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운동장 너머 바로 앞에 남자 중학교가 있었다.
하얀 얼굴에 오뚝한 콧날, 긴 다리 깊은 눈매..... 그 남학생의 성품이 어떤지 눈곱만큼도 모르는데도 매일같이 버스 안에서나 길에서 마주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자연히 나도 모르게 혼자 정이 들었다. 그 빛나는 이목구비를 가진 남학생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땐 눈에 보이는 것에 먼저 반응할 나이였다.
과학 선생님을 짝사랑할 때만 해도 그 편지는 과학 선생님을 향해 썼다. J를 늘 보면서도 1학년 때는 그나마 정신이 확실히 총각 선생님이셨던 과학 선생님께 쏠려 그 남학생에게 푹 빠진 정도는 아니었다.
거의 1년간 계속해서 연애편지 같은 것을 썼다. 일기장에도 쓰고 예쁜 편지지를 사다가 쓰기도 하고 수도 없이 자주 보았어도 내내 말 한마디 건네본 적 없이 2년을 꼬박 열병 같은 짝사랑을 앓았다. 그 남학생 이름 머리글자가 J로 시작되어 일기장이며 편지지에 그에게 쓰는 글은 항상 'J에게'로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이선희의 'J에게'라는 노래가 나와서 나는 그 노래에 취해 얼마나 애절하고 슬픈 마음으로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푼수 짓이 끔찍할 만큼 주접스럽고 대단했다.
여고생이 된 뒤에야 수소문하여 겨우 그 남학생이 어떤지 조금씩 주워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느낀 첫인상처럼 참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라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가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먼발치에서도 가슴이 두근 반 세 근 반 뛰었다.
혹시 몇 년간 내가 지독하게 짝사랑한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수도 없이 썼다가 한 번도 건네보지 못한 그 유치한 편지를 한 줄이라도 읽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혼자 치를 떨었다. 나의 닭살 돋고 유치함의 극치를 달리던 그 구구절절한 사랑 고백을 끝내 그 남학생이 알지 못하고 졸업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상대방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데 나 혼자 그런 것이 너무 창피하고 자존심 상할 것 같아 끝내 고향을 떠나기 전 마지막 기회조차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런 나의 소심함을 가끔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인연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스쳐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 그렇게 짝사랑만 한 것이 억울해서 다신 그런 무모한 짝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누군가가 나를 짝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의 복수라도 하듯 은근히 그것을 즐기곤 했다. 어느 날 싸이월드에서 그 남학생의 홈피를 찾았다.
배경음악이 멋져서 그 홈피를 열어놓은 채 저녁을 먹었다. 수없이 많은 같은 이름 속에서 그 홈피를 발견한 즈음이 하필 저녁을 먹기 위해 한참 생선을 굽고 있을 시각이었다. 그걸 붙들고 더 보고 있을 수도 없었고 그대로 닫아버리기도 아쉬웠다.
저녁을 먹고 찬찬히 실려있는 사진들을 보았다. 잘 어울리는 부인과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다정한 사진들을 보아도 다행히 질투가 나진 않았다. 나랑 사귀었던 것도 아니었고 단지 이름과 얼굴만 알면서 철없던 어린 시절 짝사랑하였던 상대여서 그랬는지 부인이 과히 미인은 아니었던 것이 배가 덜 아픈 원인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사진 속의 그가 행복해 보여서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단정하고 귀티 나는 어린 왕자 같던 그 소년도 세월을 거슬러 갈 수는 없었는지 살이 통통하게 붙어서 처음엔 몰라볼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그 모습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소년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 나이 즈음의 평범한 아저씨티 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여전히 귀여운 미소가 빛나 보였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선 내가 나이가 이만큼 들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그 멋대가리 없이 까무잡잡한 얼굴에 깡마른 열다섯 살 소녀에게 그런 추억조차 없었다면 나의 중학생 시절 기억은 얼마나 건조하고 재미없었을까.
그런데....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 사니깐 우린 다시 마주칠 일 없으니 하는 말인데.... J야 어쩌다가 살은 그렇게 쪄서 아저씨가 되어버린 거니...!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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