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좀 완만한 길로 걸을 수 있을까...... 편안해지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 집에서 모질게 든 정 훌훌 털고 목요일엔 이사를 간다. 며칠째 몸이 긴장되어 잠을 잘 못자면서도 기분이 좋다. 아직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였는데도 그래도 기분이 좋다. 한 가지라도 좋아지는게 어딘가. 모든 게 한 번에 흡족할 만한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정말 큰 욕심이다. 이만하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변화다.
낮에 보물상자를 새로 산 박스에 옮겨 정리하면서 울산 주소로 97년 8월 등기 소인이 찍힌 편지 봉투 한 장을 발견했다. 내 기억엔 울산엔 아는 사람이 없다. 기억을 열심히 더듬다보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역시 그 당시엔 얼마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던 사람인지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그 봉투는 그 즈음 나우누리 어떤 동호회 게시판 활성화를 위해 게시판 글을 한 달에 한 편 정도씩 정해서 도서상품권 등을 상품으로 주곤 했는데 마침 그 봉투에 그때 받은 도서상품권이 담겨져 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상품을 협찬하여 발송한 분이 아니나 다를까 작년 가을에 김장 김치를 보내주셨던 블로그 친구 '썬'님이셨다. 그동안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당시 그 동호회를 인연으로 아직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 그 상품을 내게 보낸 분이 썬님인줄은 몰랐다.
빈 편지 봉투를 보물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동안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때 그 당시에 상품이었지만 그 선물을 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싶어서 도서상품권은 꺼내 쓰고 누군가의 글씨가 담긴 그 봉투를 버릴 수가 없어서 편지함에 보관해두었던 모양이다. 난 참 그러고보면 별걸 다 기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봉투를 그때 쓰레기통에 버렸더라면 이렇게 다시 생각할 기회를 잃었을텐데 보관해둔 보람이 있다.
편지함 크키를 줄였더니 차곡 차곡 정리된 편지가 두껑이 겨우 닫힐 만큼 수북하다. 저렇게 많은 편지를 받은 걸 보면 그에 버금가게 많은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이사하면 오래 전에 보던 손때 묻은 책들을 집에 옮겨놓을 참이다. 물론 다시 그 책을 꺼내 읽을리 없겠지만 한 때 치열하게 책을 파고 들었던 내가 살았던 시간을 가끔은 기억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필요한데도 책과는 거리가 먼 생활에 익숙해진 내게 조금이라도 자극이 될 수 있을까하여 얼마나 달라졌는지 얼마나 게을러졌는지 한 번쯤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겠다. 내가 살던 방을 정보신문에 내놓았더니 오늘 당장 전화가 걸려오고 방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내일 계약하러 온다는 전화까지 받았다.
그런데 낮에 방을 보러 왔다간 아저씨 말고 그 다음 서울이라며 전화를 걸어온 젊은 새댁이 바다가 보이냐고 물었던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다른 사람이 먼저 계약하게 될 것 같다는 전화를 해주면서 은근히 이것 저것 물었다. 5개월된 아이랑 둘이라는데 왜 서울에서 이렇게 먼 통영까지 이사를 하려는지 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바다가 가까워 문 열고 골목길만 나서면 바다가 보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내가 겪었던 슬픈 밤을 아이랑 보내게 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방을 내주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것 같다. 내일 오기로 한 사람이 와서 계약을 하고 나면 수요일에 서울에서 방을 보러 오겠다던 그녀에게 문자라도 다시 띄워야겠다. 통영에 이사와서 심심하면 우리집에 놀러오라고.....
나도 이젠 누군가 놀러오라고 청할 수 있는 깨끗하고 넓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분 좋다. 뒷감당할 일이 까마득하지만 그렇게 소원하던 바였으니 그 한 가지만이라도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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