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15년 살면서 여태 보낸 겨울 중에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고 쉬고 밀린 영화나 드라마도 보면서. 이제 일주일 남은 개학 전까지 학교 일 남은 것 매일 조금씩 정리하고 남은 시간 동안 유럽여행 사진 남은 것 정리를 마저 해 볼 참이다.
프랑스, 독일까지는 정리가 다 되었고, 이제 남은 곳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부분인데 시간이 좀 지나고보니 경로가 머리 속에서 정리가 안된다. 사진을 뒤져서 시간을 확인하고 보니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넘어간 뒤 처음 간 곳은 숙박지인 잘츠부르크에 갔다. 그 다음 잘츠캄머굿과 할슈타트 순서가 헷갈린다.
오늘 숙제는 오스트리아 여행사진 정리하고, 딸과 약속한대로 안동찜닭을 맛있게 만들어주는 것. 며칠 음식을 계속 만들다보니 요리할 때 내 정서가 좀 안정되는 느낌이 들고,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것도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된다. 설거지 하기가 좀 귀찮을 따름이다.
학교 급식이 워낙 맛이 좋으니 학교 급식보다 내 음식이 더 낫다고 하는 카레, 미역국, 김치찌개 외에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메뉴만 찾아서 해주고 있다. 이제 일주일 후에 개학하면 열흘 남짓 지나면 졸업식과 종업식이 있을 것이고 업무 인수인계를 마치면 1년 간의 내 일도 마무리 될 것이다.
여행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된다. 이제 딸과 함께 그런 긴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힘들 것이다. 더 일찍 생활의 기반을 잡고 더 많이 다니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직도 내 경제상태는 그닥 좋은 편은 못되지만, 항상 모든 조건이 충족된 다음에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의욕, 그 다음은 돈, 그 다음은 시간.
남은 내 인생에 큰 욕심은 없다. 딸이 잘 크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여 앞가림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고, 나는 건강하게 곁에서 그 삶을 지켜보며 정신적인 버팀목으로 남을 수 있으면 하는 정도이다. 딸이 없었더라면 이 지루한 삶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얼추 큰 숙제를 다했다 싶으니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헤이해져서 사는 게 지루하고 기운 빠진다.
** 알랭 드 보통의 책 한 권을 사놓고 내내 읽지 않다가 최근에 그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마음이 혹해서 다시 책을 읽고 있다. 내생이 있다면 다음엔 꼭 유럽의 선진국에서 태어나서 살아보고 싶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개체로서의 생의 순환이 우주의 기본적인 원리라고 생각하고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또 태어날 수 밖에 없다고 알고 있다. 언젠가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몰두하여 끝을 보고 싶었는데 그 자체가 자연의 이치, 우주의 생성원리를 거스르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애를 낳고 나름 평범하게 잘 살아보려고 노력해왔는데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이왕에 말 나온 김에 더 욕심을 말해보자면, 꼭 태어나야만 한다면 지구가 아닌 다른 은하계에 좀더 정신적으로 진화된 무리가 있는 곳에 태어나고 싶다. 정말 욕심이 너무 많군. 잘못된 것 같고 그릇된 것 같아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런 삶을 살아가야만 얻을 수 있고 깨우칠 수 있는 바가 있기에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다. 어릴 적 항상 숙제를 못해가서 학교에서 벌서고 집에 와서 매를 맞던 동생을 보다못해 대신 숙제를 해준 적이 많았다. 그리곤 성인이 되어서도 대신 조카를 잘 키워주려고 애쓰고, 삶의 틀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 부질없는 일인줄 알고는 어느날부터는 내게 꼭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일 외에는 신경을 끄고 살고 있다. 내 앞가림이나 잘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남에게 듣기좋은 소리 맘에 없는 소리 잘 못하는 이 뻣뻣한 성품 덕분에 조용히 사람들과 많이 섞이지 않고 살기로 했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 잘못하진 않지만, 밥벌이로 하는 일을 하면서 다 괜찮은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면서 사는 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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