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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5>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by 자 작 나 무 2015. 6. 21.

알랭 드 보통의 책 속에서 샤를 보들레르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샤를 보들레르(1821년, 파리 태생)

그는 일기에서 "'가정의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병"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외로움, 가족과 학교 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고독한 삶을 살 운명이라는 느낌"으로 인해서 겪는 고통을 토로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일상"(이 시인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이 기억나지 않는 다른 곳, 먼 곳, 다른 대륙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날씨가 더 따뜻한 곳, 「여행에의 초대」에 나오는 전설적인 2행에 따르면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호사와 고요와 쾌락"인 곳. 그러나 그는 여기에 따르는 어려움도 알고 있었다. 

〈'여행의 기술' 중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에서 발췌〉

 

몹시 공감 가는 내용을 발견하면 줄을 치는 이들도 있지만, 요즘 굳어버린 내 머리와 손이 감각을 되찾도록 하는 차원에서 빈 공책에 새삼스러운 표현이나 공감 가는 내용을 옮겨 적어보고 있다. 처음엔 한글파일을 만들어서 거기에 저장하려고 했으나, 손이 글씨를 쓰던 감각을 거의 잃어가고 내 단정하던 글씨가 맘대로 휘갈긴 것처럼 씌어지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딸에게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옮겨적는다고 말했더니 살짝 비웃었다. 한 때, 수에 대한 감각을 거의 잃어서 기초적인 셈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던 30대 초반에는(출산과 육아로 인한 피로가 심하고 산후우울증에서 회복되지 않았던 때) 길을 나설 때마다 앞에 보이는 차 번호판 4자리 수를 각기 한 자릿수처럼 생각하고 더하거나 빼거나 곱하는 셈을 머릿속으로 반복해서 했다. 몇 해 뒤에는 자연스럽게 다시 셈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수학 문제를 풀면서 셈을 못 하고 머리가 안 돌아간다며 자신에게 화를 내는 딸에게 그 이야기를 해줬다.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내 머리가 고등수학까지 큰 거부감 없이 풀어내게 된 것에는 큰 노력이 있었음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학생이었을 때는 수학 문제를 풀 때마다 잘못 계산하여 답을 제대로 내지 못할까 봐 진땀을 흘리곤 했다. 아는 것을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증도 있었던 때라서 편안한 마음으로 문제를 풀지는 못했다.

 

지금은 내가 이해해야 딸에게 가르쳐줄 때 쉽게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학생이었을 때보단 여유롭게 문제를 풀거나 풀이 과정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막연하게 학교 시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제를 풀 때와는 다른 입장이 되고 보니 오히려 지금이 공부하기는 편하다. 물론 머리는 그때보다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때론 보는 순간 꽉 막히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딸의 최근 고민거리 중의 하나는 책을 읽으면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 많아서 읽기가 싫다는 것이다. 나도 20대까지 읽었던 책에서 얻은 얇은 지식을 기반으로 겨우 버텨왔고, 이제는 읽었던 책도 거의 기억하지 못할 만큼 머리가 도태되었다.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으니 이 비어버린 머리를 뭔가로 또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가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영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요즘 소설이나 수필을 읽으며 그런 경험을 대신하는 사람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나도 그 부류에 거의 합류한 셈이다.

 

딸이 책을 읽는 것을 싫어하는데 억지로 강요해서 읽으라고 할 수가 없어서 요즘은 틈나는 대로 책을 펴놓고 이렇게 치매 예방 운동한다는 핑계로 책 옮겨쓰기도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사놓고 몇 장 넘기다 덮어둔 책을 꺼내서 읽다 보니 꼭 내 생각 같고, 내 맘 같은 구절이 가끔 눈에 들어온다.

 

보들레르의 일기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알랭 드 보통의 책 속에서 보들레르라는 시인이 겪었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여행과 관련하여 발췌해서 옮긴 것을 나도 옮겨본다. 그의 표현에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우울하고 불행했던 내 유년 시절을 스스로 애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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