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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5>

10월 27일

by 자 작 나 무 2015. 10. 27.

어제부터 딸이 다니는 학교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시험 시작 2주 전부터는 거의 집안에 갇혀 지낸다. 딸이 학원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공부하다 수시로 모르는 것 물어보면 가르쳐줘야 하니 밖에 나가지 말고 곁에 있으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에도 친구가 눈 뜬 사람들은 다 놀러가더라면서 같이 놀자는 카톡을 보내왔는데 딸 핑계로 못 간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 놀자고 하니까 당장 외롭단다. 나는 바쁘지도 않은데 시간을 맘대로 낼 수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아침 일찍 눈뜨고 다시 잠들지 않을 만큼의 체력이 되는 것 같아 그동안 벼르던 연대도에 가려고 했는데 비가 쏟아진다. 오후에는 섬에 숙박하거나, 거주하는 사람 외엔 배에 태워주지 않는다. 결국 또 다음에 가야겠다 마음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기운이 빠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친구가 준 케냐 원두를 갈아 진하게 핸드드립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손바닥만한 쿠키를 몇 개나 먹고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딸이 첫날 시험을 치고 점심때 돌아왔다. 여태 한 번도 수학 100점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시험엔 수학 100점을 받았다며 좋아한다. 학원 다니는 친구들처럼 집에서라도 시간 맞춰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이 들었더라면 진작에 어느 정도 실력이 붙었겠지만, 항상 필요한 때만 잠시 공부하다 보니 수학이랑 영어 점수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시험 기간에 잠시 앉아서 공부해도 점수가 나오는 과목들은 거의 100점인데 영어와 수학 점수가 떨어져서 항상 뭔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수다 한 판 거나하게 펼쳐놓고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내일과 모레까지 아직 시험은 남았다.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수능 때까지 계속 시험에 시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매번 내가 이렇게 집안에 꼭 붙어서 공부를 봐줘야 할 수밖에 없다. 수학 문제 풀면서도 조금만 어려우면 화를 불같이 내며 소리를 지르고 이렇게 어려울 수 있냐고 항의를 해대더니 어제부터 갑자기 수학이 쉬워졌단다.

 

* 

'수퍼맨이 돌아왔다.' 100회 특집 편을 보다가 마지막에 거기 나오는 꼬맹이들이 '아빠, 아빠'를 외치는 장면들만 모아서 편집해놓은 부분에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들이 다정하게, 혹은 자신을 내맡기는 안전함을 갈망하며 아빠를 찾는 목소리들이 어찌나 간절하고 예쁜지..... 평생 다정하게 아빠라고 한 번 불러본 기억도 없는 내 딸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 장면을 혼자 보다가 울컥 치오르는 눈물에 당황하여 볼륨을 줄이고 제 방에 있던 아이가 올까 봐 얼른 눈물을 삼켰다.

 

함께해서 더 불편하고 상처받을 아빠는 오히려 더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아이여서 내 선택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저도 저렇게 다정하게 부르고 치댈 수 있는 아빠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은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4,5학년 정도 되었을 때, 친구들이랑 집안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반 친구 중 어떤 아이가 새아빠 이야기를 했단다. 그 친구에게 잘해줘서 새아빠가 좋다고. 그즈음 나더러 새아빠를 구해달라고 했다. 그즈음부터 싱글 카페에 기웃거리며 누군가 만나서 인연을 맺어볼까 하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둘이 지내던 생활의 틀이 제법 단단해져서 내 생활 속에 자연스레 누군가 들어온다는 것이,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서스럼없이 마음을 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결론만 얻고 결국 아무 일도 벌이지 못하고 말았다.

 

딸은 아빠 얼굴도 모르고, 어디에 어찌 사는지 조차 모른다. 나도 모른다. 양육비 한 푼 주지 않는 파렴치한이라 그냥 인연을 끊는게 당연하다 여기고 찾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어지간했으면 가끔이라도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갈증이 덜하게 아이에게 다른 기회를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여지가 전혀 없었다.

 

앞으로도..... 가끔 아빠라는 존재가 인생에 필요하다 느껴지는 순간, 딸은 나를 엄마이면서 아빠라고 여기고 살아가겠지만, 엄마가 혼자라서 힘들겠다 생각하고 내 걱정에 오히려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할 때, 한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되진 않을지 걱정이 된다.

 

결국 자신을 배제하고 뭔가 선택을 해서 잘못되었을 때, 누군가 대신 책임져주거나 그 무게를 함께 해줄 이는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기로가 될 선택의 문제는 부모가 우선시 되어서도 안되고, 객관적인 이목에 치중해서도 안된다.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자신이다. 내게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서 나에게도 필요한 사람이어야만 긴 인연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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