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학교여서 금세 적응했다. 항상 새로운 환경이나 낯선 사람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힘들어하는 성격인데 이번엔 쉬웠다. 내가 맡은 3학년 학생들이 1학년이었을 때 1학년 담임을 했다. 그래서 학생들도 나도 서로 익숙해서 오랜만에 봐도 그다지 어색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이제 2주만 지나면 이 일도 끝난다. 지난 금요일로 지영이 기말고사도 끝나고 조금 홀가분해졌다. 오늘은 실컷 늦잠 자고 종일 집안에서 뒹굴뒹굴하며 지냈다. 지영이는 무려 13시간이나 자고 내가 깨워서 겨우 일어났다. 비가 하늘에서 들이붓듯이 내리더니 잠시 잠잠해졌다. 너무 습해서 에어컨을 틀었더니 필터 청소를 안 해서 그런지 냄새가 난다.
지영이 방에도 벽걸이 에어컨을 하나 사다 달아야 여름을 날 수 있을 것 같다. 갓난아기일 때 살던 집이 너무 더워서 애가 잠을 못 자고 칭얼칭얼 울어서 10개월 할부로 샀던 작은 벽걸이 에어컨을 여태 썼는데 이젠 도무지 AS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 장만해야 할 것은 새로 장만해야 하는데 왜 그걸 여태 바꾸지 못하고 물이 줄줄 새는 걸 그냥 뒀는지 모르겠다.
그때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되는 유일한 물건이다. 그 집에서 이사 올 때 가져왔던 물건 중에 냉장고나 TV는 이미 차례로 고장 나서 새것으로 다 바꾸었다. 그나마 그 에어컨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새 에어컨이나 사야 했는데 여름방학되면 같이 제주도 여행 가자는 딸의 말에 솔깃해서 월급 받기도 전에 이미 비행기표며 숙소 예약하느라 여분의 돈을 다 써버렸다.
그래도 뭔가 한 가지는 변화가 생겼으니 나쁘지 않다. 어쨌든 에어컨은 사고 다른 일거리가 또 생기길 바랄 수밖에. 어떤 날은 20대에 종신직으로 내게 주어졌던 그 사립고등학교에서 평생 발 담고 있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몰아쳐 와서 한숨을 쉬기도 하고, 어떤 날은 거기에 들어앉지 않아서 어쩌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며 30대를 그렇게 보내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안정적인 삶의 길을 따라 걸었다면 어쩌면 지금 딸이랑 둘이 이렇게 살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뭔지 모르게 모자라고 부족해 보이는 엉성한 삶을 살고 있지만, 딸이 행복해하니 나도 내 엉성한 선택과 실수에 대해 관대해진다.
싱크대 막힌 것 뚫고, 옥상에서 내려오는 물이 막혀서 복도로 넘칠 지경이 되어 밖에 나가서 비바람 속에서 하수구 뚫고 나니 뭔지 모르게 시간이 멈췄다가 갑자기 다른 세상에 다시 뚝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가 미뤄뒀던 수학 공부나 더 해야겠다.
친구 블로그에서 리뷰를 읽고 새로 구입한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책은 설레는 마음으로 사놓고 항상 나중에 너무 심심할 때 읽겠다고 밀쳐둔 것이 한두 권이 아니다. 이상하게 다 읽고 나면 재밌는 것이 다 사라져서 허전함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뭔가 작은 재미 한두 가지는 저축하듯 남겨두고 싶어 진다. 새로운 책을 보면 어떻든 빨리 읽어버리곤 했는데 읽고 싶은 책을 사놓고 몇 장 읽고 책상 위에 계속 쌓아두고 지낸다. 매사에 의욕이 그만큼 줄어든 탓이겠지.
딸을 돌보기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일 외에는 거의 관심도 의욕도 없이 나이만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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