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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8>

문이 잠겨서

by 자 작 나 무 2018. 3. 7.

3월 7일
어젯밤에 딸과 함께 분리수거한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갔다 왔다. 한동안 집 정리를 조금씩 하다가 버리려고 모아둔 이불이나 헌 옷가지와 인형들까지 쓸어 담아 가장 큰 쓰레기봉투에 담아놓은 것까지 버리자니 두 번은 내려갔다 와야 했다. 한 번 1층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두 번째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가려던 차에 딸이 이야기하다가 웃으며 출입문을 닫았다.

 

평소에 하던 대로 손잡이를 쿡 눌러서 잠가버렸다. 문이 잠긴 걸 알게 된 순간 둘이 어찌나 당황했던지 금방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땐 문이 잠기면 손잡이 플레이트를 열어서 반쯤 해체한 다음 얇고 뾰족한 걸로 문을 따는데 나는 거의 선수급이라 별 걱정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문 손잡이를 새것으로 바꾸면서 아주 빡빡하게 플레이트를 조여놓았고, 거기다 밖에서 새로 페인트칠까지 해서 맨손으로는 그 손잡이 플레이트를 돌려서 열 수가 없었다.

 

그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평소에 실수했던 때와는 너무 다른 표정을 지었다. 나는 완전 구질구질한 체육복에 슬리퍼를 신고 딸은 수면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나마 머리는 감았기 망정이지 거지꼴 비슷했다. 그 꼴에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 밤에 도대체 어디 가서 도움을 청할 것인가? 

 

있는 힘을 다해서 손잡이를 해체해보려고 악을 썼지만 꽉 잠긴 플레이트 부분이 꿈쩍도 안 한다. 딸이랑 번갈아 돌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와중에 변수는 이전 손잡이와는 달리 바깥에서도 손잡이 부분만 해체할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는 구조라는 것이었다.

 

이 집에 살면서 몇 번이나 새로 손잡이를 사서 갈기를 반복하다 보니 일반적인 방문 손잡이를 해체하거나 조립하는 건 상당히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새로 조립한 문 손잡이가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어떤 점이 다른 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쓰던 손잡이는 이 집에 살던 전 주인이 기구를 이용해서 한번 플레이트를 열어준 적이 있어서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갈 때마다 내가 손으로 플레이트를 살살 돌려서 해체한 다음 문을 따곤 했다.

 

일단 플레이트를 열 수 없는 상황에서 볼처럼 생긴 손잡이라도 뽑을 수 있으니 일단 뽑아서 뭐든 쑤셔서 열리도록 용을 써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손잡이를 쑥 뽑아놓긴 했는데 새로운 방법으로 어찌 열어야 할지 당황한 상태로 뭔가 할 수가 없었다.

 

내일 당장 애 학교는 어찌 보내며, 이 밤에 집에 못 들어가면 빈손으로 어디 가서 어찌 하룻밤을 보낼지 상상만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앞으론 쓰레기 버리러 나갈 때도 옷을 좀 말쑥하게 입고 나가야겠다. 딸에게 생각 없이 문을 잠그고 닫으면 어쩌냐고 화를 냈다. 

 

그리곤 저 복도 끝에 불 들어오는데 서서 뭐든 좋은 생각을 해내라고 종용했다. 그랬더니 딸이 내가 쑥 뽑아놓은 손잡이를 들고 옆집 앞에 가서 졸랑거리다가 이사 나가고 문을 통째로 바꾼 그 집 손잡이에 꽂아놓은 옆집 열쇠를 뽑아서 들고 왔다.

 

내가 손잡이를 뽑아놓았으니 거기다 열쇠를 집어넣고 딸각거리면 열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잡이 뽑은 다음에는 딱맞는 열쇠가 아니어도 꽉 물린 쇠 사이에 열쇠를 넣고 달그락 거려주니 그냥 쉽게 열린다. 그런데 손잡이를 다시 조립해도 그대로 쑥 빠지고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안에서 다른 잠금 장치로 문을 잠그고 하룻밤을 보낸 다음 오늘 방문 손잡이를 파는 멀리 있는 마트까지 가서 새 손잡이를 사 왔다. 능숙한 솜씨로 망가진 손잡이를 해체하고 새 것으로 바꿔 달았다. 딸이 어제 집에 들어와서 손을 씻으러 욕실에 있는 나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너무 긴장되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란다. 

 

둘이 거지꼴로 돈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자주 가던 이웃도 멀리 이사를 가서 하룻밤 신세 질 곳을 슬리퍼 신고 찾을 수도 없는 늦은 밤이어서 너무 걱정이 되더란다. 그리곤 손잡이 사서 새로 달 수 있냐고 몇 번을 물었다. 

 

예전에 쓰던 거랑 좀 다르고 플레이트가 너무 빡빡하게 조여져 있어 열리지 않아서 이번엔 문을 못 딸 줄 알았다. 내가 많이 긴장하고 힘도 없는데 손이 부르트도록 손잡이를 돌리고 빼는 걸 봐서 딸이 몹시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정말 별일도 아닌데 어딘가에 도움을 청할 곳이 없고 손에 아무 것도 없으니 황당하고 씁쓸했다. 그럴 때 누군가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집에 들어오게 된 다음 그 서글펐던 심정을 하소연이라도 해봤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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