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02(수) 17:16
안락사의 정당성에 관한 리포트를 쓰기 위해 지난번 수업 중에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삶의 단절을 통한 고통의 단절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법적 허용 여부에 대한 정당성 논의가 아닌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것이니만큼 결정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여러 가지 차원의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고통스러워하는 말기 암 환자들의 존엄성 있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거나 너무 많은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연장하는 환자들을 돕는 차원에서 안락사가 정당하다는 논리에 대해 나는 이렇게 반박했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살아 있는 순간순간이 고통인 사람이 그 삶을 단절시키는 자살은 죄악으로 치부하면서 육체적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자살을 돕는 행위와 크게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육체적으로 병들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통증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도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도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안락사,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할까.
두 가지 상황은 여러모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에 주어진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음이고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될 삶의 여정에 포함된 것이다.
가끔 지극히 견뎌내기 힘든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 문제를 떠안았을 때 출구를 찾기보다는 탈출하여 도망칠 수 있는 구멍을 찾고 싶었다. 적당한 핑계를 대동하여 자살을 선택하려 한 적도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별개의 문제로, 살아야 하는데 살길이 막막하고 답답한 사람의 경우엔 현실적으로 겪어야 할 시간이 불치병처럼 버티고 있으니 삶의 본질은 정녕 고단한 것일까?
정신적인 고통을 제공하는 원인이 과감히 수술하여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면 정면 대응이 불가능하고, 고스란히 고통을 겪어야 할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반복적으로 그 고통을 겪어내야만 한다. 가끔 끝이 있는 것도 있지만 인간의 정신적 고통과 번민은 종류를 달리하며 불시에 생겨나는 것들이라 일일이 피해 갈 수도 없고 모른 척할 수도 없다.
정신적 고통을 제공하는 문제들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대처 방안과 대안은 없을까? 매를 자주 맞다 보면 매집이 생긴다는 말처럼 인간에게 주어지는 정신적인 고통도 겪어낼수록 통증도 적고 쉽게 넘어가질 수 있는 것일까?
언젠가 실연에 대한 면역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20대엔 빈번한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고민이 너무나 컸고, 매번 사람들과 만나면 헤어질 때 느끼는 고통은 횟수를 거듭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이별이 없어서 차라리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소극적인 발상도 해봤다.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도사리고 있는 인생도 그것이 두려워 그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가. 여태 살아오며 겪고 견뎌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앞으로 또 어떤 형태의 괴로움과 즐거움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번번이 괴로운 것은 가볍게 지나가 주지 않고 나를 아프게 뒤흔들고 혼란스럽게 하고 지나온 세월을 모두 구토하고 싶을 정도의 통증을 부른다. 다만 익숙해지지 않는 이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그 속에 있으면서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남의 일 구경하듯 가끔은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그 속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말은 고통의 터널을 벗어난 뒤에나 할 수 있는 말이어서 정작 고통의 불길 속에 있는 이들에겐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하게 해 달라는 주장보다 더 앞서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인간답게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줄 많은 경제적 지원 못지않게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 기운을 북돋워 주고 일어설 힘을 끌어올릴 수 있게 도와줄 역할을 해줄 상담자나 도우미들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정신적 피폐함을 벗어나고자 앞당겨 죽음을 선택하게 도와주어야 할 이들의 고통보다는 오히려 살아 있으면서 칼날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이 더 피부에 와닿는다.
정신적인 고통이거나 육체적인 고통이거나 고통을 제거 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해는 구할 수 있겠으나, 결코 보편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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