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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8>

바람이 분다

by 자 작 나 무 2018. 9. 4.

정체되어 있던 뜨거운 공기들을 몰아낸 바람이 선선해진 오후. 드디어 내 인생에 정체되어 있던 묵은 인연들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는 것인지......

 

갑자기 일시에 여기저기서 카톡이 쏟아져 들어온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과 동기 여학생 7명 완전체가 채팅방을 채우고 일시에 인사말들이 쏟아진다. 조용히 혼자 저녁을 먹을까 했는데 점심때 학교 급식소에서 밥을 같이 먹고 가사실에서 원두 갈아서 커피까지 같이 마신 왕언니가 퇴근길에 또 내가 보고 싶은지 차 한잔 하자 신다.

 

 

오랜만이라 반가워야 할 옛친구들과의 대화창을 닫고 해질세라 얼른 밖으로 나섰다. 저녁은 생략하고 항상 내가 걷던 바닷가 산책코스 반대편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13년 만에 내 편지를 받은 친구가 아침에 전화를 걸었다. 나중에 통화하자고 물린 전화를 때마침 한다. 같이 온 선생님은 혼자 앞서가시고 한참을 통화했다.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은데 동행한 분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친구가 섭섭해하는데도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나간 시간도 지나간 인연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이다. 오늘 나를 불러 내준 분께 충실하기로!

 

 

오랜만에 또 한참 걸어볼 참이었지만, 오늘 쌓인 피로가 얼굴에 역력한 그 선생님의 눈매를 보고선 한 자리에 눌러앉아 시시각각 바람 부는 대로 구름이 흩어지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연신 감탄하며 넘어가는 빛이 부리는 조화에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니 갑자기 내가 투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내 가난한 영혼을 그대로 관통할 것만 같은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볼에 간지럽게 와닿는다. 해마다 맞는 가을이지만 이 신선함은 새롭고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상어모양 구름이 한산도 위에 떠있다.

 

 

 

곁에서 하는 이야기가 잠꼬대처럼 흩어진다. 그냥 바람에 날려버려도 좋을 이야기다.

 

 

 

외로울 때마다 사람이 그리워 밖으로 나섰다가 결국 이 아름다운 풍경에 설득 당하고만다. 혼자 가만히 몇 걸음씩 걸으며 자리를 옮겨가며 이 광경을 바라보았을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바닷바람 맞으며 가을 여자가 되어본다. 둘이서 가을 여자는 '추녀'라고 말하며 깔깔거리며 한바탕 웃었다. 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여자인 것이다. 내 곁에서 함께 웃어주는 그 분은 내년 여름에 정년퇴임을 하면 남도를 떠나실 분이다. 나 또한 올 겨울 딸의 입시가 문제없이 치러지면 고향인 이곳을 떠날 사람이다. 

 

 

 

다시 이 광경이 그리워 바람따라 흘러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때 와서 스치듯 지나가는 이들에게만 아름다운 곳은 아니다. 항상 숨쉬듯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라 하더라도 나는 늘 처음처럼 이 아름다운 풍경에 설레고 또 설렌다.

 

 

 

 

 

 

 

 

집에 돌아오니 일찍 온 딸이 내게 대뜸 건네는 첫 마디

"회 먹고 싶어~!"

"나도~!"

 

엎어지면 코닿을 데 있는 회국수집에 쪼르르 달려가서 회를 주문한다. 오늘은 광어회다.

 

 

가장 쫄깃한 부위를 제일 먼저 딸이 집어든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끊임없이 회를 먹어준다.

 

 

갓 끓여낸 성게미역국은 단골인 우리를 위한 서비스~

 

 

 

어제 휴업이라 못 먹은 치킨 대신 회를 먹으니 이제야 뭔가 먹은 것 같다. 도톰하게 잘 저며낸 광어회의 싱싱함이 가을 저녁 뭔가 채워지지 않던 갈증을 잠시 씻어주듯 만족스럽게 넘어간다. 우리 모녀는 이 맛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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