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사들였던 통 넓은 블라우스를 꺼내 입어보니 임신복 같아서 입을 수가 없다. 작년 여름엔 어떻든 최대한 가릴 수 있는 옷을 사야만 했다. 해마다 조금씩 알게 모르게 불어난 살이 엄청나서 거울을 보기도 싫을 정도였다.
딸 낳기 전에 50kg 정도의 마른 몸을 유지하고 살았다.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아도 대체로 늘 날씬했다. 그래서 먹는 것에 구애 받지 않고 먹고 싶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정도였다. 기초대사량이 적어지고 움직이는 일도 줄어들어서 그런지 먹는 대로 살이 찐다.
스무 살 때와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그때와 비교해서 15kg 이상 찌니까 사람이 정말 달라보였다. 최근 들어 BMI 지수 고려해서 적정치의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찬바람 나면 운동 좀 하리라 생각하고 그럼 지방비율도 더 줄어들 것이다.
지금은 근육양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살이 빠져도 그리 날씬해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이 이상 말라봐야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전에 편하게 입던 많은 옷들이 맞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사람의 외모는 나이 들면 큰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건강과 직결된 부분은 중요하다.
살 빼기 전엔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아서 건강에 위험요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흔하게 있는 고지혈증은 아주 마른 친구에게도 있어서 별 거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면서 일부러 위험요소를 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까지 게으르게 자신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년째 나를 그대로 내버려둔 것은 일종의 마음의 병이었다. 나이가 들었으니 이런 모습으로도 살아봐야 아줌마답다는 둥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우스개로 하면서 딸을 안심시키고 허허 웃었다. 그런데 속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포기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끝내 단절시키고 사는 게 진정 내가 원하던 것이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게 되었다.
작년에 집 근처 학교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는 대학동창을 만났을 때 옛날이랑 얼굴이 변한게 없다고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방학 전에 인사를 나누면서는 말이 바뀌었다. 살 빠지니까 진짜 옛날 같다고 작년에 처음 봤을 땐 살이 좀 쪄서 놀랐었단다. 역시 여전하다는 말은 립서비스였다.
살이 빠지고 보니 친구들이 가끔 밖에서 만나면 나를 보고
"어쩌다 그렇게 됐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런데 그 말이 또 다른 각도로 들리기도 해서 밖에 나가기가 싫고, 나가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대학 다닐 때 동창들이 내가 제일 연애도 잘 하고 제일 잘 나갈 줄 알았다 했다.
그런데 연애는 제일 얌전하고 내숭 떨던 친구들이 제일 잘 했고, 덕분에 빨리 짝을 만나서 안정된 생활을 했다. 난 내 욕심에 차지 않는 사람과 대충 맞춰서 길게 만나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다 싶으면 무조건 그만둔다. 딱 한번 그만두지 못한 경우가 있다. 우리 동네에 방 얻어놓고 매일 찾아와서 결혼해달라고 구애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 집요함에 발목 잡혀서 임신해서 딸을 낳게 되었다.
내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몹시 힘들 때였다. 그렇게까지 엮이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었다는 건 그때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사는 게 어떤 각도로든 버겁고 힘들 때는 사람을 함부로 만나선 안 된다. 나중에 안정을 찾고 나면 잘못 만난 인연에 대해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을 만나기엔 외형적으로 좋았을 30대에 나는 여러가지 악조건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누구든 다가오지 못하게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마음을 열지 않고 건성으로 대하고 가슴 아픈 말로 돌려세우기도 했다.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만큼 내 삶이 안정적이다.
어린 딸에게 부족함없이 뒷바라지 하기 위해 항상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시간들도 다 지나갔고, 딸의 사춘기도 지나서 이젠 엄마도 더 늙기 전에 연애하라고 조언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뭘 더 바라나 싶다. 그래서 그냥 욕심 부리지 않고 조용히 그렇게 지내던 대로 지낼 참이었다.
그런데 딸이 걱정을 한다.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해 떨어져야 할 시기가 오면 나 혼자인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내 주변에 너무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불안하단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다보니 친구들도 한때 친했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니 나처럼 한가하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사람 상대할 만큼 사는 게 만만하지 않으니 친구들이 나를 찾을 때 외엔 조용히 지내게 된다.
그 친구네 애들도 이제 다 컸고 남편이랑 아이들이랑 잘 지내는데 무슨 친구가 또 필요할까..... 나만 외톨이 같이 느껴져서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다. 그래서 결국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하려면 온라인 카페나 기웃거리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