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길지 않아도, 그리 깊지 않아도 누군가와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사회 정의론 수업이 한창일 때 어진이를 비롯한 여학생 몇 명이 책을 가슴에 안고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일반적인 정의라고 했다고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국가의 법이 정의롭지 못하면 그것도 지켜야 하나요? 그것도 정의인가요?"
그 작은 체구에 눈빛을 반짝이며 도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그들에게 찬찬히 이야기해주고 이전 학기에 배웠을 시민 불복종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 의문을 품고 부정의 한 것을 발견하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그 수업은 충분했다고 질문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어휴~~ 예쁜 것들~~~"
그 예쁜 애들을 만나는 시간은 신난다. 마음과 마음에 다리가 놓여서 서로 편하다.
항상 꼴찌여서 야단만 맞는다는 반에 가서 그 반이 꼴찌인 이유는 그 반 아이들 전체가 다른 반 아이들보다 떨어지는 게 아니라, 몇몇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의욕을 잃어서 손을 놓아버린 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직 인생이 창창한데 학교 공부 좀 밀린다고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고 모두 공부를 잘 할 필요는 없으니 주변에 있는 그런 친구에게 관심 가져주고 말도 걸고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면 같이 공부하자고 깨워주기도 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 말을 칭찬으로 들었다.
그반 아이들이 열광하며 담임선생님께 뛰어가서 그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 반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피드백을 해주셨는데 그 대화가 상당히 즐거웠다.
학습과 거리가 먼 1주 1시간 수업하는 2, 3학년 반에선 침묵이나 부딪힘이 나를 힘들게 하는데, 1학년 수업은 상호작용을 할 수 있어서 신난다. 격주로 학교에 오지 않고 띄엄띄엄 만나서 몇 번 대면하지도 못했는데도 그들은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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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오랜만에 급식소에서 먹을까 하다가 메뉴를 보니 썩 내키지 않아서 운동장 지나서 강변을 둘러 다시 뒷문으로 기숙사에 와서 기숙사 뜰 앞에서 서성거렸다. 해진 뒤에 늘 걸으러 다니던 내가 저녁 산책을 멈춘 뒤부터 조금 우울해하는 것을 느끼셨는지 차 하나 사서 학교 마치고 주변에 좀 돌아다녀 보라는 말이 나왔다.
대원사도 가고, 덕산서원도 가고 가끔 함양 상림에도 넘어갔다 올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얼굴로 활짝 웃었더니 성질 급한 남 선생님께서 중고차를 알아봐 줄 만한 곳에 전화를 금세 넣고, 새 차 딜러까지 줄을 대신다.
옆자리 오 선생님도 질세라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부군께 문자를 보내셔서 금세 내게 누군가를 소개해주셨다. 심지어는 점심때 근처 자동차 정비소에 중고차 보러 가자며 나를 데려가 주시기도 하신 남 선생님의 성의에 부합하고자 정말 이번에 차를 살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다.
강변에서 저녁에 딸에게 전화했더니 차를 사는데 전적으로 동의, 내 사정을 잘 아시는 강 선생님께 전화드렸더니 정말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셨다. 올해까지는 어떻든 선생님께서 시간 나시는 대로 주말에 시간 내서 차를 태워주신다고 연말에 연식이 바로 넘어가는 차를 사지 말라고 하셨다. 비용과 생활비, 수입을 가늠하여 자동차를 산 뒤에 부대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든다고 만류하셨다.
여러 사람과 이야기 하고 보니 막막하던 생각에 가닥이 잡힌다. 내년 봄에 상황이 좀 달라지면 그때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그 일은 접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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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여놓은 일거리가 책상 위에 남아있어서 어두워진 뒤에 4층 연구실에 올라가야 했다. 오늘은 계단 오르내리기도 불편하고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피곤하고 기운 빠져서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비장애인 사용금지'라고 써놓을 만큼 타지 않아도 될 3층에 가는 남학생이 많이 사용해서 정작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할 때 타는 것도 가끔 신경 쓰인다.
오늘 저녁엔 여학생 한 무리와 거기서 마주쳤다. 서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한 여학생은 무릎을 다쳐서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다리가 아파서 계단 오르기 힘들다며 3층까지 가겠단다. 나는 생리통 때문에 계단 오르기 불편하고 배도 아프다고 그랬더니 공감하는 듯 여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엔 생리통도 거의 없었는데 애 낳고 나니까 뒤늦게 생겨서 이 나이에 이게 뭐니..... 입맛도 없고, 속도 울렁거리고, 저녁도 못 먹어서 힘도 없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탄 미안함을 씻으려 하는데
"읔~! 선생님, 애도 있어요???"
너무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는 2학년 여학생들이 3층에서 내리면서 정말 놀란 듯이 말해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나와 아무런 유대관계도 없는 내 수업 안 듣는 낯선 아이들의 말이니 기분 좋은 착각에 대해 잠시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
"그래, 무려 내 나이가 ...... ㅠ.ㅠ"
여학생들 눈에는 내가 아줌마로 보이지 않나 보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