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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PMS

by 자 작 나 무 2020. 11. 7.

어제 버스에 오르자마자 딸은 내 옆자리에 앉아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집에 가서 마저 이야기하자고 몇 번을 물린 다음에야 말을 끊었다. 감정이 그토록 격앙되게 하는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어보니 평소엔 그런 일에 너무 의연해서 놀라울 정도였던 딸이 심하게 감정적이다. 내게 끊임없이 그 말을 다 쏟아내야 안정될 것 같았지만 시외버스 안에서 계속 흥분해서 이야기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시외버스에서 내린 뒤 그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딸이 이번엔 캐리어를 두고 내려서 다시 캐리어를 찾으러 홈을 떠나버린 버스 찾아 헤매야 했다.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도 계속 뭔가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딸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3주 만에 집에서 만나게 되는 딸을 반갑게 안아줘야 할 것 같은데 감정에 들떠서 호들갑스럽게 말하고 눈빛이 불안정한 모습은 보기 드문 모습이어서 그간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럴까 싶을 정도였다.

 

집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먹을 수 있게 미리 음식을 주문하고 와서, 환기하고 테이블 닦고 잠시 기다리니 금세 배달음식이 도착했다.

 

언제든 딸이 고개를 끄덕이는 간장찜닭을 먹고 그간 밀린 이야기를 했다. 내가 학교에서 겪고 있는 이야기를 했더니 딸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바닥에 주저앉아서 운다. 나는 감정을 끌어올리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는데 듣는 딸은 감정 이입하게 되어 듣기 괴로웠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는 컴퓨터를 켜놓고 책상 앞에 담요 덮고 앉아서 가만히 쉬면서 딸에게 자잘한 일을 하게 시켰다. 들은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는지 허둥허둥 헛손질하며 안절부절못한다. 그래도 이야기할 데가 딸뿐이어서 이야기했더니 듣고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딸이 왜 그렇게 감정적이었는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나와 같은 이유에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다. 고기 먹여서 푹 재우면 다음 날은 거짓말처럼 괜찮아진다는 것을 잘 안다. 일단 시작되면 괜찮아지는데 생리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부터 슬슬 호르몬이 몸을 급격하게 피곤하게 만들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감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호르몬의 지배하에서 그렇게 강건하면서도 순하고 이성적이던 딸도 어쩔 수 없는 것을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살짝 안도감이 느껴진다. 나도 엊그제 저렇게 감정이 폭발해서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도 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이라기보다는 하지 않고 피하려던 말을 한 것이다.

 

입 다물고 못 본 척하고 지나치고 흘려버리고 피하려던 것과 결국 그 순간에 충돌했다. 그날 저녁에 남 선생님께서 8교시 수업 들어간 사이에 나는 퇴근하고 곧장 읍내 통닭집에 가서 닭 두 마리를 사 와서 수업이 끝난 뒤에 연구실에서 함께 통닭을 먹었다. 그리고 푹 자고 나서 다음 날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여전히 그때마다 적응하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고 나로서만 감지할 수 있는 감정적인 실수를 더러 한다. 그나마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큰일은 저지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여겨야겠다.

 

*

나는 출산 후에 PMS를 심하게 겪고 있다. 그전에는 이런 증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생리 전 1주일은 내가 아닌 것처럼 감정적이고 예민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불안하다. 생리가 시작되면 그 증상은 거짓말처럼 완화된다.

 

이번엔 그 시기에 미친 듯이 달 사진 찍으러 나가서 안 해도 될 말을, 평소엔 하지도 않는 카톡을 길게 써서 보냈다. 그전엔 대상 없이 게시판에 이상한 글을 써서 그 시기에 쓴 글은 너무 눈에 띄어서 항상 주목받았다.

 

며칠 전 생리 시작 전 일주일 동안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고, 냄새에 지독하게 민감했고,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것 같았다.  저항도 못 하고 호르몬의 노예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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