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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3>

하늘빛 그리움

by 자 작 나 무 2003. 9. 21.


2003. 9. 21

몸살에 감기까지 드디어 환절기에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컨디션이 좋지 못할 때 감기 걸리면 좀 오래가는 편이어서 내심 걱정스럽긴 하지만 이제 대충 정리가 된 방안을 휘둘러보며 마지막으로 잠들기 전 걸레질을 한 번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티브이를 보다 잠들까 하다 문자 들어오는 소리에 슬쩍 들려던 잠이 깼다. 문장이 길어서 세 번에 걸쳐서 정성스럽게 보낸 문자였다. 어떤 내용이든 오늘 안에 낯선 문자가 올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걸 확인하는 순간의 기분은 참으로 묘한 설렘이 있어 상큼하고 좋았다.

 

'인디언의 전설에 의하면 태양과 달이 형제로 태어날 때, 어머니가 죽게 되자 어머니의 육체를 줘서 어머니의 가슴으로 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 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저에겐 당신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 홈피에 수 놓인 별들을 떠올리고 쓴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런 글을 옮겨서 보내준 것이 생활고에 지친 내게 어쩌면 쉽게 스치고 웃어넘길 것일 수도 있는 것일 수 있지만, 참으로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긴 여운이 남는 감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들뜨고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이 정리된 기분 이 든 뒤에 온 것이라 그런 것인지 상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내 맘이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구호품으로 들어온 음료수 한 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마셨다. 레몬 향이 살포시 나서 상큼하고 시원하다. 즐겨 음료수를 사서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한 상자나 들어왔길래 덕분에 매일 물 대신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얼굴은 핼쑥해졌는데 살은 더 찐 것 같다. 열량 많이 나가는 구호품 덕분인지 몸은 힘들어도 맘을 편히 가지고 열심히 먹고 움직인 덕분인지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나를 힘들게 할지 모르겠지만 미뤄두었던 일들을 대충 마무리하고 보니 이제 몸만 잘 추스르면 되겠다.

 

선물 받은 색깔 고운 한지 두 장을 이제야 형광등 주변에 달아놓았다. 긴 형광등에 하늘빛에 나뭇잎이 들어간 느낌이 드는 한지를 씌워놓았던 불빛이 한결 은은한 것이 분위기가 좋다.

 

혼자 책상머리에서 차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는 일이 많은 나에게 저 조명은 제법 사랑을 받을 것 같다. 진짜 나뭇잎을 종이에 넣어서 만든 것처럼 위로 올려다보면 나뭇잎이 비쳐 보인다.

 

진짜든 가짜든 이 방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선물 받은 것을 치우지도 못하고 그냥 두었다가 벽지를 다시 바른 후에야 분위기를 내고 싶은 기분이 들어 붙여보았는데 한결 산뜻해진 이 방에 잘 어울리는 듯싶다.

 

창을 열면 저녁 무렵부터 불어 드는 바람은 냄새부터 다르다. 짧은 소매를 입은 팔에 와 닿는 순간 서늘하다. 가을이다.......

 

또 얼마나 짙은 외로움이 나를 흔들어놓을지 벌써 걱정은 되지만 길지 않을 것 같은 가을을 한껏 즐겨볼 생각이다.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아서 늘어난 옆구리 살을 약간 제거하고 와인색 원피스에 좀처럼 신지 않던 구두도 신고 외출할 계획까지 세워본다.

 

굳이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아니어도,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라도 옷장 안에 묵혀둔 옷들에 가을바람을 쏘이게 해주고 싶다. 그보단 지금 콧물까지 훌쩍여지는 이 감기가 빨리 떨어져 나갔으면 싶다.

 

흐르는 이 음악처럼 가슴을 사르르 떨리게 하는 하늘빛 그리움에 온통 젖어보고 싶은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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