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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퀸스 갬빗을 보다가.....

by 자 작 나 무 2020. 12. 5.

집에 돌아와서 책 한 줄 읽지 않았다. 인터넷이 되는 곳에 돌아왔으니 컴퓨터와 한 몸이 되어 살다시피 한다. 어제저녁부터 보기 시작한 체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 '퀸스 갬빗'을 보다가 어릴 때 장기 두던 생각이 났다.

 

10살 이후에 꽤 장기 두는 것을 즐겼던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가족 중에 나를 이기는 상대가 없어질 때까지 연구하고 집중해서 그다음 수까지 계산하며 게임하는 것을 즐겼다. 승부가 있는 일에 지는 것을 싫어했고, 될 때까지 하는 기질이 있었다.

 

타고난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한 것이 아니라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심하게 민감한 내게 세상의 많은 자극은 고통이었고, 한 번 걸은 길가에 대문 색깔이나 모양, 상호까지 낱낱이 기억나는 머릿속은 괴로운 정글이었다. 그 자질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어쩌면 어설프게 뭔가 해냈을지도 모른다.

 

내 삶에 몰입할 수 없는 지옥과 주름 하나하나를 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았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연이어 차오르는 고름주머니 같았다. 과감하게 수술해서 떼어버리지 않으면 영영 분리할 수 없는 악성 종양이 뇌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삶이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애써서 쳐다보고 기억하지 않으면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차라리 이 괴로움이 한결 낫다. 아니, 이건 괴롭지 않다. 내가 꼭 알아야 할 것이라면 그렇게 쉽게 흘려보고 스쳐 지나가지는 않을 테니까. 나를 스쳐간 인연은 흘려야 할 것이었고, 눈에 담아야 할 얼굴과 가슴에 묻어야 할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 생활이 차라리 그때보다 낫다.

 

드라마에서 제작자가 보여주려는 것과 별개로 내 머릿속을 정리할 코드를 발견하면 그대로 샛길로 빠진다. 그때 나였다면 나도 저렇게 집요하게 한 가지를 물고 늘어졌겠지. 모르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워서 혼자 어떤 책이든 빌려서 끝내 내 것이 되도록 만들던 습성 덕분에 아직 이 엉망인 머리로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내 눈빛은 너무 시리고 아프고 차가웠다. 몇 장 되지 않는 사진 속 내 얼굴은 내일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어두운 표정 일색이다. 그것이 싫어서 30대 중반 이후에 찍은 사진은 항상 웃으며 찍는다. 어두운 표정으로 그때 내가 아팠던 것이 떠오르고 힘들었던 일을 떠올리게 되는 게 싫다.

 

사진 한 장으로 늘 슬프고 불행했던 사람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남은 기록이 하나같이 슬프고 아프고 힘들 때만 뭔가를 남겨서 내 삶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좋을 때는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생각을 바꿨다.

 

꽤 오랜 시간 아프고 힘들었던 때도 여행지에서 한 번 웃고 찍은 사진으로 나머지 기억은 사라진다.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떠오르는 기억과 싸우다 지쳐서 내 머리는 드디어 기억을 희미하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다. 기록 없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가끔은 옛날 일기를 읽다가 왜 그런 글을 썼는지, 글 속에 언급한 인물이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이 많은 사람이 잊혔다. 잊어서는 안 될 얼굴과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은 기록하지 않아도 선명하다.

 

*

오늘이 일요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 시간에 커피 한 잔 마시고 집 정리하고 또 떠날 생각에 주말 이틀 동안 쉬던 집에 겨우 적응하면 일어서야 하는 내 몸이 붕 뜬 기분에 흔들린다. 지난 금요일부터 줄곧 집에서 지냈더니 이제 좀 쉰 것 같다. 이제 해야만 하는 일이 기다리는 곳에 가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커피 마시고 편하게 노트북으로 일기도 쓰고, 뉴스도 아무 때나 들을 수 있고 언제든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이란 게 있어서 다행이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이 공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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