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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전설처럼 아득한 기억 한 가지

by 자 작 나 무 2020. 12. 26.

그해 초봄, 그는 서른 세 살이었다.

 

힘들이지 않고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했다. 무려 7개 국어를 한다는 사실이 외국어에 특히 약한 나를 더 주눅 들게 했다. 입을 열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그는 젠체하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나를 일부러 기죽이는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물 같은 꼴사나운 부류도 아니었다. 

 

당시 스물 네 살에 사시에 합격해서 최연소 합격으로 신문에도 실렸다는 말이 내게 직접적으로 한 유일한 자랑이었다. 건방이 하늘을 찌를 만큼 남이 잘난 것에 관심 없고 반응하지 않은 내가 너무 차갑고 무신경한 것을 두고 질책하듯 갈망하듯 관심 좀 가져달라는 뜻으로 겨우 한 마디 던진 자랑이었다.

 

그래도 밉지 않았다. 오히려 질투날 정도였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기에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것을 이루고 쌓았을까 싶었다. 단순히 많이 알아서 똑똑한 것이 아니라 그는 드물게 제3의 눈까지 뜬 특별한 존재 같았다.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도 그 부분이었다.

 

여자들 머리엔 똥만 든 것 같아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가 나에게 반응 없음으로 거절당하고도 호감을 남발하는 구애 편지를 쓰고 또 써서 보냈다. 그 투지 덕분에 편견 많고 고집 세고 삐딱한 내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많이 깨지고 배우고 허물어지고 다시 살 게 되었다. 그가 지닌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싶었던 욕심을 바탕으로 더 깊게 파고드는 것이, 그를 먼저 떠나보내고 유일하게 그에게 가까이 갈 방법이었다. 

 

그가 이해한 우주와 세계를 보는 눈이 어떠했는지 나도 그만큼의 눈높이를 갖고 싶었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느낀 이 세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 방법은 그렇게 그럴 닮아가는 것이었다. 우매한 나를 어리석음의 굴레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게 할 마지막 망치질을 그렇게 해주고 갔다.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이 우선이었던 20대에 사랑에 처음으로 눈먼 나를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으로 그는 나를 일깨워주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것을 찾게 했다. 이후의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내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게 그 찬란하고 어두운 시간에 관통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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