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만에 머리를 감은 딸이 해 질 무렵에 튀김 덮밥이 먹고 싶단다. 나가서 사 먹고 오라고 보내면서 돌아오는 길에 튀김 덮밥집 근처에 있는 '단팥 하우스'에 가서 단팥죽 한 그릇만 포장해오라고 시켰다. 장사도 잘 안될 텐데 카드 쓰지 말고 현금 주고 오라고 3,500원 지폐와 동전까지 맞춰서 건네줬는데 무겁다고 그냥 갔다.
조금 전에 돌아오는 길에 딸이 손에 들고 온 음식은 그 가게보다 한참 위에 있는 엉뚱한 집에 가서 먹고 싶지도 않은 팥칼국수를 포장해왔다.
내가 그렇게 명확하게 가게 이름도 알려주고, 먹고 싶은 음식 이름도 알려줬고, 가격에 맞춰서 돈까지 챙겨줬는데 엉뚱한 가게에 가서 엉뚱한 음식을 주문해서 포장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왜 내가 한 말과 다른지 생각해보지도 않았거니와 내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거다.
먹고 싶지도 않은 푹 퍼진 팥칼국수는 그 집에서 내주는 무채 무침이 아니고는 맛있게 먹기 곤란해서 포장해서까지 먹을 음식은 아니다. 어릴 때 가난의 상징 같은 그 음식을 오늘처럼 스트레스 꽉 차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날에 먹고 싶을 리 있나.
며칠째 직장에서 가져온 온갖 자료를 방안에 헤집어 놓고 문서 작성에 정신줄 놓고 사는 내가 밤낮 기침에 시달리다가 약 먹고 겨우 한숨 자고 꾸역꾸역 뭔가 먹고 근근이 버티는 꼴을 보고도 그렇게 무심한 딸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왜 화가 났는지 조목조목 이야기하며 핏대를 올렸더니 목 안이 얼얼하다.
나에 대해 신경 써주고 관심 가져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거다. 큰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모처럼 달달한 단팥죽 한 그릇 먹고 기분 풀고 남은 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어쩌면 저렇게나 나에게 무심하다 못해 제멋대로일까.
이상하면 전화 한 통 해서 다시 물어도 될 것을,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것에 화나서 버릴 수도 없고, 먹기도 싫은 분노의 팥칼국수를 어찌할까.......
*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믿고 있는 상대에 대한 실망감, 배려 없음에 서운하고 상처 받는 나도 참 오늘은 한없이 불쌍하단 생각이 든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나 섭섭하고 화가 날까......
마음 둘 곳 없다는 현실을 마주한 까닭이겠지.
남은 일 마무리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다.
*
이거 쓰고 화장실 갔더니 딸이 발을 씻고 있다.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엉덩이 툭 치고 장난 걸 뻔했다.
나는 참 속도 없지. 화 내면 1시간은 화난 척해야 하는데
30분도 안 돼서 바로 웃음이 난다.
분노 유발 팥칼국수는 몇 젓가락 먹었는데 배 아파.
이제 딸은 필요 없어. 나도 남자 친구나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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