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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1>

문득 생각난 옛날 일

by 자 작 나 무 2021. 2. 25.

스무 살 되던 해 봄에 나는 왼쪽 팔목에 붕대를 감고 다녔다.

정원 10명에 4학년 때까지 모든 시간표를 똑같이 짜서 매일 보던 과 동기들이 내가 왜 다쳤는지 알지 못했다. 뜬금없이 의심하기 딱 좋은 팔목에 꽤 오래 붕대를 감고 다녔는데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었다.

 

정말 길 가다 엎어져서 유리병 깨진 것에 찔린 것으로 생각했다. 설마 그랬을 리가......

나는 어쩐지 착하디 착했던 그 친구들에게 정이 없었다. 마음을 열고 내 상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은 좀 더 일찍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몰랐다. 온방에 피투성이였던 곳에서 나를 발견한 그들만 그 사실을 알았다. 왜 그랬는지 묻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병원에서 상담할 의사를 만났는데 내 부모가 어찌나 급하게 나타나서 그 상담을 깨버렸는지, 나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

 

피투성이로 응급실에 실려가서 깊은 상처를 속에서부터 치밀하게 깁고 또 기워서 겨우 붙여놓은 팔목의 상처만 아물었고 흉터는 크게 남았다. 아직도 그쪽 팔목은 만지면 시큰거리는 것 같다. 나는 왜 그때 죽고 싶었을까. 왜 아무도 내 웃는 얼굴 너머의 슬픔을 읽어낼 수 없었을까.

 

말해야 한다. 해야 할 말은 꼭 해야 한다. 웃어넘긴다고 괜찮은 게 아니니까. 벌써 3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 기억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2년이나 흘렀다. 

 

이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만 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때는 그렇게 살아난 것이 참 싫었다.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사는 잉여인간처럼, 투명인간처럼 살았다. 가족이란 나를 살게도 하고, 죽고 싶게도 하는 무거운 틀이었다. 아무도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없고, 내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크나큰 슬픔이었고, 고통이었다.

 

지금의 나는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읽히는 단순 무식한 아. 줌. 마. 그래서 오히려 살기 편할 때가 많다. 혼자 동떨어져 살면서 글로도 말을 섞지 않으니까 나와 다른 사람은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외계인이거나, 그들은 내 동족이 아니거나.

 

갑자기 이 생각이 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동료와 친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내 주변에 의미 없이 스쳐간 인연일 뿐이었다. 다 내 탓이었겠지만, 나는 내내 그들을 탓했다. 대의를 위해 100일 파업해야 한다고 수업 들어가지 말고, 수업 거부하라고 그렇게 종용해놓고선 내가 멀리 떠나고 없었던 겨울방학에 자기들끼리 보강하고 학점을 땄다. 

 

나는 그들의 그 행각을 참을 수 없었고, 앞뒤 없이 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뭐든 뒤집는 그들이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 도대체 뭘 망가지게 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신념 같지도 않은 신념 나부랭이에 그렇게 핏대를 세우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변했는지....... 나는 그 모든 것에 실망했다.

 

졸업 여행도 함께 가지 않았고, 졸업 앨범에 같이 실릴 사진도 함께 찍지 않았다. 나는 단단히 화가 난 채로 그렇게 그들과 형식적으로 만났다가 헤어졌다. 왜 섭섭하고 화가 났었는지 말할 기회도 없었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면서 줄도 잘 섰고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살이에 합류해서 보란 듯이 다 잘 산다. 세상살이는 그런 것인데 모자라는 게 많아서 내 머리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세상이 싫어서 등 돌리고 섰더니 여전히 먼발치에서 곁눈질만 하며 산다.

 

그런 친구 따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아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아는 사람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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