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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0>

너네는 몰라

by 자 작 나 무 2021. 3. 15.

*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써놨던 일기를 옮겼다.

 

2020. 02. 03

 

후배 : 선배, 저는 남자가 결핍된 사람 보면 딱 알아보는데 언니는 전혀 안 그래요.

나 : ..... 어쩔 수 없이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어.

 

후배 :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겼는데 왜 화장을 옛날 사람처럼 그렇게 해요?

카페에서 일어서기 전에 화장 좀 고치는데 후배들 앞에 앉혀놓고 살짝 눈치 보여서 대충 더듬더듬했더니 그런다.

나 : ..... 옛날 사람 맞잖아. 89학번.

89년생 후배들이 나를 옛날 사람이라 부른다. 학번 트기 전에 내가 40대 초반인 줄 알았다는데 괜히 털었다.

 

후배 : 선배, 술은 좀 해요?

나 : ..... 음주가무엔 약해. 술 못 해. 

후배 : 아잉~ 또 만나줘요. 

나 : 그래. 남자만 준비되면 갈게. ㅎㅎㅎ

(여태 싱글이라 외롭다고 그렇게 털었으니 남자 소개해준다고 만나자는 줄 알았다.)

후배 : 우리 남표니가 와인바 하는데..... 와인은 술 아니니까 나 만나러 와줘용~

 

애교 섞인 웃음에 홍홍 거리며 후배가 막 나를 말로 잡아끈다. 이상하게 여자 후배들이 나를 따르며 좋아한다. 엄청 어르신인 줄 알았다가 말을 시켜보니 너무 웃기고 재밌단다. 

 

결국 새로운 곳에서 나는 여자만 잔뜩 사귀고 왔다. 그들은 모른다. 여신도 아닌 주제에 고고하게 오랜 세월 선택의 여지없이 독수공방 하다 어느 날은 사리라도 토할 것 같은 내 심정 죽어도 모를 거다. 

 

강의실에서 앞자리에서 졸지 않으려고 반지 안 끼고 들어온 남자 교수나 강사들 앞에 두고 싱글인지 아닌지 가늠하며 상상 놀이 좀 했다니 까르르 넘어가면서 내 농담의 반은 진심이란 거 그들은 모른다. 이제는 거추장스럽다는 남편이 공기 같고 가족 같아서 뭐 그렇다는 둥..... 그래 정말 그런지 두고 보자. 내가 조만간에 와인 마시러 가주지!

 

 

* 해야 할 일 놔두고 뭔지 모르게 계속 우울하고 울적해서 와인 한 잔 마시고 보니 남편이 와인바 한다던 그 후배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꼭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핑곗거리가 많아서 만나러 가지 못했다. 그때 함께 보자던 후배님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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