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 주의보가 뜬 것은 봤지만 이 화창한 날에 조금 열린 창으로 그렇게 바람이 훅 불어 들 줄은 몰랐다. 내 등 뒤에서 뭔가 떨어지더니 와장창 소리가 났다. 벽에 걸린 시계가 떨어져서 유리가 깨졌다. 그보다는 완전히 박살 났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유리 파편이 전신에 튀어서 책상 위에 있던 커피를 비우고 꽤 수북하게 깨져서 널브러진 유리 조각 앞에 놀라서 멍하게 서 있었다. 노트북에 연결한 랜선이 너무 짧아서 어쩔 수 없이 옆 책상과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았기 망정이지 내 자리에 제대로 앉았더라면 오늘 피투성이 될 뻔했다.
점심때가 지나니 다들 퇴근한다. 오늘 1차 고사 마지막 날. 어지간하면 다 조퇴 내고 퇴근한다. 근데 오늘 난 오후에 교차로 시험 치러 오는 학년 시험 감독도 걸렸다. 다들 집에 가는데 시험 감독이 끝나고도 갈 데가 없으니 집에 가기 싫어서 남아서 일했다.
어차피 비행기 표도 샀다가 환불했는데 집에 일찍 가봐야 무엇하리. 같이 놀 사람도 없는데.......
지인은 남자 친구와 기차 여행을 떠나는데 날씨가 좋다고 문자를 보낸다. 부러워서 이모티콘 하나 보내고 멍하니 근무 시간 다 채우고 퇴근하면서 마트에 들러 소고기를 샀다. 그 친구가 남자 친구랑 그 동네 맛집에서 돼지국밥을 먹는다기에 나는 혼자라도 그보다는 맛있는 것을 먹어야겠다.
이것도 지랄 비용에 속하겠다. 집에 와서 가지전 부치고 소고기로 육전 부쳐서 와인 한 모금 마셨는데 벌써 취하는 기분이다.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막 든다. 뭐 하다가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그런 게 다 부러울까. 부러워서 졌다. 혼자 소고기 먹으면 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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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사흘 동안 1일 1식하고 아침, 저녁을 굶었고, 마침 영양 보충을 해야 할 때여서 고기를 조금 사 와서는 말을 갖다 붙이고 호들갑을 떤다. 얇게 저며서 몇 조각 되지도 않는 고기지만 정말 오랜만에 고기를 샀다. 혼자선 사람도 아닌 것처럼 고기도 한 번 사 먹지 않고 지냈다.
육전 부치기 귀찮아서 해 먹지 않다가 오랜만에 부쳐보니 맛있다. 조금 남은 고기는 버섯, 양파, 당근이 있으니 같이 볶아서 잡채 만들어 먹어야겠다. 마침 당면도 딱 한 줌 남아서 물에 담가놨다. 딸이 좋아하지 않는 넓은 당면을 사 놓고 해 먹을 일이 없어서 그냥 뒀더니 남은 거다.
이제 어차피 혼자 있으니까 딸 식성이나 취향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해 먹어도 되는데 그간 굳어진 생활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장 보러 가면 딸이 좋아하는 식자재부터 쳐다본다.
며칠 사이 그렇게 감정이 들쭉날쭉했던 것은 아니나 다를까 PMS였다. 아직도 자연의 축복을 누리는 몸이 축나지 않게 잘 먹어야지. ㅋ 늦둥이 볼 것도 아닌데...... 뭔 이런 축복을.....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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