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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1>

지랄 비용

by 자 작 나 무 2021. 4. 29.

오늘은 점심 먹고 연가 내고 밖으로 나섰다. 오늘 하루 그럴 수 있는 날이었다. 일찍 나와도 어딜 가겠나. 동네 뒷산에 올라갔다.

 

 

 

어릴 때 소풍 장소였던 띠밭등에 참 오랜만에 왔다. 

 

 

미세먼지로 부연 세상, 눈앞에 보이는 세상도 부옇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세상도 온통 부옇다. 갑갑하다.

 

산 너머에 있는 절에 들러서 목 축이고

 

혼자 자주 걷던 바닷가 자전거 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보는 경치가 맑은 날엔 참 좋은데 아쉽다.

 

절에 들렀다가 여기 불상 있는 곳에 참배하고 가면서 먹을 것을 주는지 길 고양이 몇 마리가 여기 모여 산다. 

 

여기도 다녀간 지 꽤 오래 지났다. 그 사이 좁은 길을 넓히고 가마니를 깔아서 걷기 좋다.

 

 

 

 

 

동행했던 두 분은 찬 커피를 마시고 나는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여기도 예전 같지 않다. 이젠 내가 일부러 찾아가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냥 싫어질 이유가 몇 가지 보이니까 그런 생각부터 든다.

 

 

옛날 같지 않은 많은 것에 마음이 조금 쓸쓸해진다. 걷다가 내려온 곳에서 집이 멀지 않지만 우리 집에서 꽤 먼 대형마트 근처에 사는 동료의 차를 타고 굳이 그 먼 곳까지 가서 그 마트에서만 파는 맥주 캔 4개를 샀다. 집에 일찍 들어가면 혼자 쓸쓸해지는 시간만 길어진다. 

 

딸이 좋아하는 트롤 브루 레몬맛을 샀다. 나도 좋아하고 딸도 좋아하는 알코올 도수 약한 맥주를 사놓고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딸을 기다린다. 오늘도 한 캔 마시고 잠들까 싶기도 하지만 물만 마시고 일찍 자야겠다. 내일 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사람이 그리워서, 어딘가 가고 싶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 생각만 하다가 어디든 멀리 갔다 오고 싶어서 엊그제 비행기 표를 샀다.

 

결국 신경 쓰이는 게 많기도 하고, 헛도는 마음을 추슬러서 상자 안에 넣어놓고 어제 밤늦게 잠들기 전에 비행기 표를 물렀다. 이야기를 다 하진 못하고 낮에 산길에서 비행기표를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취소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 분이 그걸 '지랄 비용'이라고 한다고 알려줬다.

 

결국엔 어딘가에 쓰게 될 비용이란다. 오늘 뜬금없이 멀리 가서 시간 쓰고 안 사도 될 맥주를 사 들고 온 것도 일종의 지랄 비용 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는 이유를 분석해서 그들이 이야기하는데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치며 산길에서 박장대소했다. 사람 없는 평일 낮에 그렇게 떠들썩하게 웃을 수 있는 인적 드문 산길이었기 망정이지.

 

미세먼지 많은 날은 밖에서 걷는 게 아니다. 목이 칼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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