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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1>

5월 4일

by 자 작 나 무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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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실에 가보니 기름이 줄줄 샌다. 가스보일러로 바꾸고 배관도 다 바꾸려면 우리가 이사하지 않으면 공사하긴 어렵겠다. 이사하려고 집 찾고 큰일 치르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어서 어떻든 지금 이 상황을 적정선에서 땜질하고 버텨야 한다. 

 

오늘은 퇴근길에 비 맞고 집에 와서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워서 씻으면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부모님 세대엔 이렇게 고장 나서 속 썩이는 보일러도 없었고, 고작해야 곤로, 연탄불이었는데....... 수돗물도 아무 때나 펑펑 나오지 않던 그 시절에 물 데워서 4남매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키우느라 참 고생 많으셨겠다. 내 몸뚱이 하나도 보일러 고장 나서 물 데워서 씻으려니 성가신데......

 

태풍 치는 밤처럼 거센 비바람소리에 살짝 긴장된다. 으슬으슬 추운데 보일러를 돌릴 수 없으니 더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은 착각에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공기 탁해져서 잘 쓰지 않는 온풍기를 돌리고 멍하니 앉아 있으니 또 마음이 착잡해진다.

 

내 인생에 다른 인연은 정말 없는 걸까...... 하늘에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내려주면 좋겠다. 이 우물 속에서 나가야 하는데 어디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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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분식집에 우산 들고 찾아가서 김밥 한 줄에 튀김 몇 개를 샀다. 주문이 밀려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데 일부러 가만히 앉아서 한참 기다렸다. 그래도 이 동네 가게에서 나를 알아보고 인사도 나누는 정도는 되는 단골집이어서 그렇게 앉아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을 만큼 때를 넘긴 뒤에 집에 돌아왔다. 배가 고파서 거기 다녀온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사 온 음식을 먹었다. 내일 출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억지로 일찍 잘 의무도 없고, 오늘 저녁은 부담 없이 폐인처럼 널브러져 있어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갑자기 너무 심심하고 외롭고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다. 

 

늘 신경 쓰고 챙기던 딸이 없으니 편한 게 아니라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어지간했으면 쉬는 날 바람 쐬러 꽤 돌아다녔을 텐데...... 코로나 19 환자가 급증한 것이 신경 쓰여서 마음이 묶인다. 늘 같이 다니던 습관이 혼자 나서는 걸음을 꺾는다. 

 

이대로 방 안에서 미라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