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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1>

빛을 삼키는 바다

by 자 작 나 무 2021. 5. 6.

이상하게 월요일 같았던 목요일이다. 어제 낮잠 좀 잤다고 밤잠을 못 자서 뜬눈으로 긴 밤을 지새웠다. 그러니 피곤하지 않을 리 있나. 퇴근하고 마트에 들러 또 튀김 맛에 중독된 가지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산속에 있는 요양원에 무슨 계약하러 가신다고 가는 길에 나를 태워주신다는 분의 전화를 받고 냉큼 따라나섰다. 나를 무시무시한 방구들 지옥에서 건져줄 동아줄이 드디어 내려온 것이다. 씻지도 못하고 누워서 잠들 것 같았는데.......

 

지난주에 동료들과 함께 오후에 조퇴 내고 걸어왔던 산속에 있는 불상 앞에 서면 이런 풍경이 보인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은 한산도.

 

산에 사는 길 고양이가 사람을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보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든 먹을 것 좀 가지고 올 것을....... 여기서 한참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평일 늦은 시각이라 다녀갈 사람이 거의 없다.

 

그렇게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았는데 산에 오니까 막 기분이 좋아진다. 이왕에 아무도 없는데 사기 셀카도 한 장 찍어주고~

한참이나 기다려도 왕언니는 오지 않으셨다. 얼마 전에 차 키를 잃어버리셨다시며 치매 걱정하시던데...... 설마 나를 여기 둔 것 잊고 가신 건 아니겠지?

산길을 걸어서 한참 가다보니 내가 아는 절 너머 언덕 아래에 요양원과 어떤 다른 절이 하나 있다. 거기에 주차된 차를 확인하고 다시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갔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기다리는 분은 오시지 않고, 낯선 산새 소리에 귀를 적시고 섰다. 시간이 멈추고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오는 동아줄을 타고 넘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호수 같은 바다는 서서히 빛을 삼키고, 저 멀리 푸른 섬에도 꾸벅꾸벅 조는 불빛이 하나씩 드는데, 인적 드문 산길에 혼자 있자니 더는 안 될 모양이다.

 

마침 너무나 기괴한 고함 소리에 놀라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고함을 지른 주인공이 내 앞에서 흠씬 놀라서 뒷걸음질 친다.

시커먼 원피스를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고 어둠 속에 서 있었더니 발이 동동 뜬 귀신처럼 보였나 보다. 그래서 귀신인지 사람인지 몰라서 일부러 과하디 과하게 인기척도 아닌 것이 귀신 쫓는 소리 같은 것을 내신 모양이다.

혼비백산한 듯한 스님께 낮은 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 스님도 얼떨결에 귀신 같은 내 인사를 받아서 화답하신다. 그리곤 민망하신지 후다닥 가마니 깔린 편백숲길을 뛰어나가신다. 나 때문에 놀라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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