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한 시간 외출 내고 잠시 집에 들러서 약속한 보일러 A/S 기사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각보다 30분 늦게 나타났다. 그리고 2분 만에 진단 끝. 보일러 온수통이 터져서 이제 수명이 완전히 다 됐단 거다. 출장비 지불하고 곧장 다시 일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이상할 만큼 몸이 피곤한데 억지로 버티다가 진통제 한 알 먹고 퇴근 시간 맞춰서 나왔다. 바람이 많이 분다. 건널목에서 망설이던 걸음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옛날에 잘 다니던 골목길이 이젠 다 바뀌어서 옛날 길이 아니지만,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가보고 싶었다.
그대로 버스 타고 들어가서 쓰러져 자는 게 목표였는데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게 갑자기 싫었다. 왈칵왈칵 올라오는 설움이 가정의 달이라고, 딸 생일 지나고 곧 내 생일이라고, 어버이날이라고...... 도대체 그게 뭔데 이때만 되면 괜히 마음이 뒤숭숭하고 괴로운 것인지.......
골목길을 걷다가 단골 약국까지 걸어가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버스 타고 돌아왔다.
그리곤......
일없이 딸에게 문자 보내서 시비를 걸었다. 나와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으면 누구에게 연락해서 나를 찾을 것인지 물었다. 또한, 너에게 갑자기 연락이 안 되면 나는 누구에게 연락해서 물어야 하느냐고......
떨어져서 사니까 남보다 못한데 이게 가족이냐고 징징거렸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딸은 당황해서 전화했다. 난 그 전화도 받지 않고 심통을 부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며칠 전에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도 해보지 않은 모양이다.
우울해 죽을 것 같아서 설탕 발린 핫도그를 여섯 개 주문해서 세 개를 한 번에 먹어 치웠다. 누구든 말을 걸기라도 하면 그대로 울 것 같은데 속이 이미 다 무너져 내려서 버티기도 힘든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런 가면을 계속 써야 하는 게 오늘은 정말 싫었다.
그냥..... 오늘 문득 더 우울하고 슬퍼진 것뿐인데. 짧게 위로라도 한 번 해줬으면 했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고 되물었다. 이렇게 혼자 사는 데 지쳐서 힘들다고 답하고 창을 닫았다. 아무 의미 없어도 잘 버티는 날도 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터졌다.
어차피 사라질 수도 없는데....... 슬프고 힘든데...... 말 걸 데라곤 저뿐이어서 말 걸었다가 내가 정말 몹쓸 인간이 되고 말았다. 사라지고 싶다.
*
겨울 이불을 덮고도 이른 아침에 너무 추워서 몸이 오그라든다. 따뜻한 욕탕에 몸 담그고 싶은 바람이 간절해졌다. 보일러 고장 나서 머리 감을 물을 가스레인지에 데워서 며칠 썼다. 오늘은 고쳐서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예 보일러를 전면 교체를 해야 한단다.
집주인에게 말했는데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정말 따뜻한 물을 쓰기 어려운 집, 씻을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집에 사는 사람에게 대중탕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아침에 이불속에서 그 절실함에 대해 공감했다. 가고 싶은데 갈 수 없어서 1년 반 넘게 목욕탕 근처도 못 갔다.
호텔 욕조에라도 들어가서 좀 따뜻하게 씻고 싶어서 딸에게 몇 번이나 여행 가자고 졸랐는데 계속 거절당했다. 그런데 제 남자 친구와는 여행을 간다. 그래서 이 밴댕이 속이 추운데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따뜻한 물 좀 못 쓰게 되었다고...... 속이 뒤집힌 거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겹쳐서 그런 것이지만, 겉으로 꼬집을 이유가 그것부터 시작해서 어린이날 전공 선택과목 강의한다고 말했다던 그 교수가 누구인지 전화해서 욕이라도 하고 싶다. 결국 그날 강의는 취소했다던데...... 왜 어린이날 강의한다는 그딴소리를 해서 그날은 올 수 있었던 딸을 못 보게 했는지 화난다.
이제 보일러 새로 들일 때까지 집에 오라고 할 수도 없다. 집주인에게 전화해서 보일러 터졌다고 보낸 문자 봤냐고 물었더니 얼버무리신다. 이미 딸에게 몹쓸 소리까지 했는데 남에게 못할 말이 어딨겠나. 그래서 며칠 동안 보일러 안 돌아가서 춥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이래저래 우울하다고 말했다.
이런 말도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리지 않으면 못하는 바보다. 요구할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 내가 돈 내고 사는 집에서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는지 이런 내가 나도 싫다.
혹시나 하고 이사할만한 곳이 있는지 골목길을 쏘다니다가 근처의 집을 살펴보니 주거환경이 지금 내가 사는 곳만 못하다. 지쳐서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린 뒤에 익숙하고 조용한 이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먼 곳으로 떠나면 몰라도.
핫도그 세 개 먹었더니 배 터질 것 같다.
*
내일이 없는 삶......
기댈 곳 없는 외다리
넘어졌다가 일어섰는데
아무도 없다.
나도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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